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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eak Oct 28. 2021

헝그리 정신과 냉장고

헝그리 하지 않은 냉장고를 보며

"... 니들, 한국 복싱이 왜 잘 나가다가 요즘 빌빌대는지 아냐? 다 이 헝그리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야, 헝그리 정신이." - 《넘버 3》, 조필(송강호 분)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래전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던 때가 있었다. 비슷한 의미로 조선시대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싸우던 것도 비슷하다. 요즘 강철부대에서 나오는 출연자들 중 특전사들의 구호인 '안 되면, 되게 하라!' 역시 이와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을 강조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을 정신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좋은 의미도 있지만, 물질이 풍부한 요즘 같은 시대에는 호응하는 사람들이 잘 없다. 헝그리 정신은 미국의 복싱 영화 로키(Rocky) 4편에서 잘 보여준다. 소련 선수로 등장하는 돌프 룬드그랜은 첨단과학장비를 써서 운동을 하고, 미국 선수인 실베스터 스탤론은 시베리아 허허벌판에서 농기구를 이용하여 헝그리 정신을 상징하는 운동을 한다. 결국 이 영화에서는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실베스터 스탤론이 승리를 거둔다. 이 영화의 제작연도는 소련(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해체되는 1991년보다 이전인 1985년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헝그리 정신이 통하던 때였다. 우리나라도 아직 산업화의 말미에서 고도성장을 누리고 있었고, 물질적 풍요로 진입하던 순간이라 어려웠던 시절의 초심을 잃지 말자는 의미로 자주 쓰이곤 했다. 이 영화가 제작된 다음 해,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가 육상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어려웠던 시절 라면만 먹고 달렸다는 일화 때문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밥만 축내는 게으름뱅이 취급을 받곤 했다. 만약, 지금 청소년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바로 꼰대가 돼버리고 말 것이다. 정신은 시대를 따라 변화하고 사라지고 혹은 다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헝그리 하지 않은 냉장고

 냉장고를 열다 보면 빈 틈 없이 채워져 있는 음식과 재료들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놓여 있다. 나는 여백의 미를 신봉하는 자로써, 뭔가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정신 때문인지 실제 나의 머리숱도 빽빽하지 않고 여백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각설하고 집사람은 뭔가가 채워져 있는 준비된 냉장고를 좋아하는 반면, 나는 최소한의 음식만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구매하여 쓰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전기 스쿠터를 산 이유 중에 하나도 편하고 빠르게 무언가를 사기 위한 생활의 도구로 이용하는 측면이 크다. 하지만, 냉장고를 대하는 나의 태도와 정신은 냉장고 사용과 음식 장만을 많이 하지 않아, 냉장고에 대한 지분이 적어 말을 할 때마다 무시되곤 했다. 이 상황에서 나 혼자 냉장고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냉장고에 대한 지분을 올려 내가 냉장고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방법밖에는... 이것은 마치 회사 주식의 지분을 51%로 만들어 내가 회사를 접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요거트 만들기, 수육 만들기, 콩나물 키워 먹기, 떡볶이 만들기를 시작으로 이제는 김치까지 담그면서 냉장고에 대한 지분을 올려 이제는 냉장고에 대한 동등한 지분을 획득했다. 서서히 냉장고에서 여백의 미가 드러나고 있다. 유통기한을 넘겨 냉장고에 남아있는 음식들이 줄어들고, 냉동고를 꽉 채우고 있는 정체불명의 덩어리들도 하나씩 줄어들고 있다. 


다시 헝그리 정신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헝그리 정신과 냉장고가 뭔 상관이 있겠냐 하겠지만, 헝그리 정신을 강조해온 시대에 청소년기를 거쳐 나도 모르게 헝그리 정신이 아직 DNA에 남아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은 버리기 아까워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를 하고 한 달에 서너 번 냉장고 털이를 통해서 냉장고에서 생명력을 다해가는 재료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헝그리 정신이 작동하는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사서 소비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잘 되는 집이 얼마나 되겠나? 결국 며칠 전에는 직장에서 헝그리 정신이 발동하여 과학실에서 재배하여 수확한 다양한 크기의 버섯을 한 봉지 챙겨 왔다. 그 후엔 조개류를 해부한다는 동아리로부터 남아 있는 조개에 대한 처리를 문의해 오는 동아리 지도교사를 통해 조개도 몇 마리 받아왔다. 이렇게 재료를 처리하기 위한 음식 만들기가 시작됐다.

재료 소진 요리들. 좌) 남은 수육 처리 찌개, 중) 봄동/돼지 후지 처리 스끼야끼? 우) 과학실 표고버섯 처리용 볶음

 냉장고에서 생명을 다해가는 다양한 재료를 버리지 못하고 헝그리 정신을 발휘하여 뭐라도 만들다 보니 국적불명의 음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풍의 맛이 느껴지는 음식에서부터 동남아시아 여행자 거리에서 풍겨 나오는 향신료를 품은 음식까지, 어쩌다가 만든 요리는 '나만의 스끼야끼'라는 이름까지 가져다 붙이기도 했다. 집에서 저녁을 먹는 것이 일주일에 4번도 되지 않지만, 기회가 닿을 때마다 냉장고를 열어 유통기한이 다 되어 가는 재료들에 생명을 불어넣다 보니 언제부턴가 요리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의 음식들이 간혹 탄생하곤 했다. 그리고 냉장고의 공간 역시 여백의 미를 보일 만큼 숨통이 트여 갔다. 우유로 요거트를 만드는 것은 이제 쉬운 레벨이고, 우유가 유통기한이 지났을 때, 유통기한 지난 유유를 요거트로, 남은 요거트를 그릭 요거트로 밀어내기하며 헝그리 정신을 발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유통기한이 지나가는 혹은 지난 재료들을 그냥 버렸다면, 아직도 냉장고는 꽉꽉 차 있을 것이고, 유통기한 지난 재료와 음식들은 버려졌을 것이다. 못 먹고 자라진 않았지만, 풍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헝그리 정신을 발휘하여 재료들을 다시 살려내는 요리라는 행위를 통해 나는 자원을 절약하고, 요리에 대한 재미를 느꼈고, 또 다른 취미를 갖게 되었다.

좌)요거트 유청 분리, 중) 그릭 요거트, 우) 총각김치
시공간과 정신 

헝그리 정신을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강조한다면 그는 아마 꼰대로 불릴 것이다. 아직 급격한 산업화를 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나 먹힐 헝그리 정신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언급하는 사람들 조차 없다. 조선을 지배하던 유교사상도 서서히 그 영향력이 줄고 있다. 비빔밥을 비벼 같이 먹던 모습과 찌개를 같이 먹던 문화들도 코로나19라는 거대한 펜더믹에 의해 급격히 사라져 가고 있다. 헝그리 정신은 대한민국에서 보릿고개와 산업화를 거치며 정착되고 강조되어온 정신이다. 물질의 부족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으로 긍정적 영향을 많이 준 것 또한 사실이다. 시대를 대표해온 정신들은 시간의 흐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미시적으로는 가정마다 가훈이 다르고 거시적으로는 민족별로 민족성이 다르다. 가훈도 민족성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가정 안에서 냉장고를 둘러싼 생각의 차이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작은 노력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헝그리 하지 않은 냉장고를 통해 삶의 변화를 이끌어낸 나의 행동에 작은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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