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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형수 May 14. 2024

안개바위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그 시절에는 방학에도 자율학습이라는 것을 했다.

방학이 아닐 때도 밤 10시까지 모든 학생이 남아서 자율학습이라는 것을 한다. 하지만 난 고교 3년 동안 자율학습이라는 것을 한 적이 없다.

난 예체능이었기 때문이다. 난 입시미술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자율학습하는 시간에 미술학원에 간다는 이유로 자율학습을 안 했다. 뭐 그렇다고 쉬운 고교 생활은 아니었다. 그 시간에 똑같이 미술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겨울 방학중에는 오전 9시까지 모두 나와 자율학습을 오전에 진행한다고 한다. 예체능도 빠지면 안 된다고 한다. 방학이라 오후까지 진행하는 자율학습은 난 학원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보다 더 힘들었다.

같은 미술학원에 다니는 친구 3명이 모였다. 장경훈과 황창욱 그리고 나

“내일은 학교 가지 말자. 떙땡이다!”

우린 학교 간다고 나와 학교를 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계획 없는 여행의 목적지는 도봉산이었다.

누가 어떤 이유로 도봉산을 가자고 한지는 모르겠지만 그중 어떤 놈이 어떤 의견을 내놓아도 모두 오케이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 좋아! 가자”

우리 모두 교복을 입고 가방엔 교과서와 참고서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도봉산으로 출발했다.

창욱이의 가방 안에는 그놈의 유일한 장난감 캠코더가 들어 있었다. 지금이야 HD급 캠코더가 모든 이의 주머니에 들어 있지만 1995년에 캠코더 그것은 아이들의 장난감이 아니었다. 분명 창욱이네 집에 있어야 될 중요한 가전제품이었을 것이다.  매일 같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우리는 창욱이네 가전제품 캠코더 앞에서 미국 스케이트보드 비디오에서 나오는 미친 짓들을 흉내 내곤 했다.

모두들 목동에서 출발했기에 도봉산까지는 엄청 먼 거리였다.

한겨울에 교복 입은 세 놈이 도봉산 등정이 시작되었다.

한 겨울이라 그런지 그리 많지 않은 등산객 아저씨 아줌마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오긴 했지만 신경 쓰이진 않았을 3인방이다.

창욱이는 뒤따라 오면서 캠코더로 우리를 촬영하고 있고 카메라만 들이대면 용기가 나는 우리들은 렌즈 앞에서 무모하다 할 수 있는 이상한 짓들을 하며 한참을 올라갔다.

그렇게 낄낄대며 올라가고 있는 동안 가방을 멘 등에서 땀이 숭글숭글 맺힐 무렵.

내 앞을 가로막은 회색 화강암이 내 앞을 막고 있던 것이 아닌가.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약간 다르다.

창욱이의 카메라가 열심히 돌아가는 중이란 말이다. 내가 무언가를 보여줄 차례다.

나는 올라가야만 했다.

교복에 책가방에… 중요한 건 이태원에서 15000 원주고 산 하늘색 에트니스 보드화(1)를 신은채 올라갔다.

‘조금만 올라가서 까불다 뛰어내리면서 데굴데굴 굴려야지.’

이런 작전쯤은 가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멋지게 촬영한다고 아래로 아래로 멋지게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손잡이 같은 홈들을 잡고 몇 번 올라간 지 1분 남짓 되었을까?

낄낄대면서 아래를 보았다.

내가 시작했던 그곳이 아니었다. 대각선으로 몇 미터 이동했을 뿐인데 아래는 낭떠러지다. 그렇게 높은 곳에 내가 올라와 있던 경험은 물론 처음이다.

‘”어?”

내가 시작했던 곳이 낭떠러지였기 때문에 시작높이가 다른 것이다.

“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아래에서는 경훈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창욱이는 너무 진지하게 촬영 중이다.

“어?”

보드화를 신은 발은 아주 살짝 화강암돌기에 걸려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발이 멈추지가 않는다

덜덜덜..

“어, 저 새끼 좀 이상한데 크하하하하”경훈이가 소리친다.

“야. 아까 올라오다 본 산악구조대 아저씨들 불러와!” 난 소리쳤다

“크하하하하하하” 경훈이는 계속 웃는다.

더 화가 나는 건 웃고 있는 경훈이보다 침묵하면서 촬영에 몰입 중인 창욱이가 더 빡친다.

“야이 개새끼들아.. 빨라 아저씨 불러오라고!!!”

한참을 버티며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욕설을 다 퍼붓고 나서야 경훈이가 올라온 길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황을 이어가고 있을 때 어래서 아저씨 두 분이 올라왔다.

간단한 로프와 안전모를 가지고 올라오셨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로프는 아저씨만 사용하고 나는 아저씨가 잡고 밟는 것만 따라서 올라오라고 했다. 난 내려가고 싶었는데 올라가야만 했다.

“여기는 안개바위라는 곳인데 웬만한 사람들도 장비 없이는 올라가지 않는 곳이야”

조심하라는 말 그리고 하산길에도 까불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나의 생명의 은인두분은 그렇게 내려가셨다.

안전하게 구조 아닌 구조를 당한 나는 한참을 위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더 올라가지 않고 바로 내려가기로 했지만 경훈이와 창욱에게는 겁먹은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다.

내려오면서 애송이 같은 내 모습, 경솔하기 짝이 없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했다.

터벅터벅 주차장까지 내려와 밟은 아스팔트는 마음을 놓이게 했다.

바로 뒤 붙어 있는 창욱이에게

“야 씨발. 잘 찍혔냐? 크하하하하 한번 보자!!”

죽을 줄 모르는 3인방은 캠코더 안의 작은 화면에 머리를 박고 조금 전 있었던 멍청한 이의 사고 장면을 보며 한참을 낄낄거렸다.


기억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여기저기 뇌 속에 조각들로 흩어진 단어, 색깔, 냄새들을 불러 모아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잘 끄집어내어 정확하게 조립되었는지 경훈이랑 창욱이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1) 에트니스 보드화 - 1986년 Pierre André Senizergues에 의해 설립된 스케이트보드, 스노보드 컬처브랜드로 초기 튼튼함을 추구하던 90년대 모델들은 투박한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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