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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gantes Yang Aug 17. 2023

외풍기 오케스트라

외풍기 오케스트라


카눈 Khanun 태풍이 지나고 나면 더위도 한풀 꺾이겠거니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웬걸... 더 더워지네.


1. 매미 - 오케스트라의 주역


더위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들리기 시작한다. 잠깐동안 조용했던 매미들이 다시 울기 시작한다.

곤충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내 기억으로는 거의 평생을(매미에게 평생이라고 하면 짧게는 3~7년, 길게는 13~17년) 이상을 땅 속에서 유충으로 살다가 짧게는 7일, 길게는 평균 2~3주 정도 번식 생활을 하다가 죽는 걸로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운이 좋으면 짝짓기를 하고 번식에 성공, 운이 나쁘면 울다 죽던가 아니면 먹혀 죽던가 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이렇게 낮은 곳에 앉아있는 매미의 모습을 보기도 오랜만이다]


가끔은 매미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물론 무더운 여름 시기에 해가 떠있을 때가 가장 심하지만 밤낮 가릴 것 없이 울어대는 것 말고는 인간에게 해로운 게 있을까 싶을 정도다. 빨대처럼 생긴 주둥아리로 나무 수액을 빨아먹는 게 전부이니 나로서는 매미란 존재가 궁금할만하다. 


혹시 또 모르지.

몇십 년 혹은 몇백 년 후에 그때 가서도 매미가 멸종하지 않고 계속해서 있다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수액만 빨아먹던 빨대모양의 입으로 모기처럼 피라도 빨기 시작할지도. 문득 1997년 개봉작 스타십 트루퍼스 Starship Troopers 영화에 나온 괴상한 생명체가 생각난다. 빨대모양을 한 입으로 포로로 잡힌 인간의 뇌수를 빨아먹으며 인간의 지능을 흡수했던 기억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이다.


사실 아직까지도 개체수가 줄어 멸종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더위가 시작됨을 알리는 매미들은 더위가 최고치를 찍을 때 유독 더 많은 소음을 일으킨다. 

본인들도 아는 거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신기하게도 매미소리가 줄어들 때쯤이면 여름도 한풀 꺾여있고 세상은 가을이 시작되려고 준비한다. 세상이라 해봤자 한국이지만.


[울다 지친 나머지 나무에서 떨어졌는지 가까이 가도 움직임조차 없다]


그냥 들으면 귀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소음일 뿐이지만, 그들의 사연을 나름 상상해 보면 가끔은 한 맺힌 곡소리로 들릴 때도 있고, 비명일 때도 있고, "나 여기 있소!", 하면서 존재를 알리는 신호 같기도 하다. 그들 나름의 사연이 겹치고 겹쳐서 그들의 이야기 따위엔 관심 없는 우리에겐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전해질뿐이다. 


2. 외풍기 - 오케스트라의 또 다른 주역


자연에는 매미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외풍기가 있다.


이전에 한여름 때 방문했던 아부다비의 밤이 연상될 만큼 목이 막힐 정도로 더웠던 밤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두 집에서만 들리면 외풍기 소리가 아파트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에어컨으로 우리 집이 시원해지면 시원해질수록 바깥 온도는 올라가게 되어있고, 다른 집들은 더 많은 시원함을 위해서 에어컨을 질세라 틀게 된다. 그 무수히 많은 집들 중에는 우리 집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제조회사가 같은 집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제조회사를 둔 외풍기들이 하나둘씩 둘 아가며 다양한 소리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외풍기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것도 한밤중에, 그만큼 더위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말도 안 되는 더위에 고통받고 있었을 것이다. 


동네에서 울려 퍼지는 매미집단의 울움소리에 맞먹을 정도로 울려 퍼지는 외풍기 소리.


익숙하지는 않았겠지만 뭔가 자신들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듯한 비명소리를 접하게 되면 매미들은 더 격렬하게 울기 시작하겠지. 뭐가 되었건 경쟁이고, 개체수는 정해져 있으니깐.




더우면 덥다 짜증. 추우면 춥다 짜증.

짜증을 내게 되는 이유는 정말 다양하다.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회원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80.5세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같은 해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이보다 약간 높은 83.5세라고 한다. DNA 분석을 통해 확인된 인간의 자연수명 38년을 한참 넘어선 수치다. 의술이 발전하면서 '100세' 시대를 누릴 만큼 사람의 기대수명이 길어졌으니, 앞으로도 매 여름마다 외풍기의 단합력은 더 대단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경쟁할 대상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이상 매미의 존재 또한 유지되거나 또다시 진화를 거쳐서 모든 동네의 일인자로 군림하는 날도 올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신기하게도 여름에 태어났지만 더위엔 약하고 추위엔 강하다.

오늘도 더위에 지친 나머지 쓸데없는 소리 몇 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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