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 예술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국내/국제 콩쿠르의 현실

by Gigantes Yang

현대음악 예술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IMG_1119.jpg 비엔나 중앙묘지 [좌: 베토벤, 중: 모차르트 기념비, 우: 슈베르트]


작품을 쓰기에 앞서 필자는 늘 고민한다.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작되는 수없이 하는 많은 고민들.

나의 생각과 철학을 충분히 담았다고 생각되면 그것만으로도 작품성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완성된 작품을 두고서 작곡가 자신만의 만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작곡된 작품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우선적으로 앞서는 것은 사치일까.

수상을 많이 하고 위촉을 많이 받으면 작곡을 '잘한다'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닐까.

작품수가 무조건 많고 또 다양하다고 좋은 걸까.


나의 작곡 세계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할 때가 많다.

도대체 그 예술의 기준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하나의 작품을 작곡한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질문 | question 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고 스스로 답 | answer 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답 | answer예, 아니오 | yes or no 의 단답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어떠한 형태의 경우에도 서로 이해관계가 성립되게끔 하는 작업 과정을 의미한다.


필자는 작품 위촉도 받아보고, 공모전에도 입선을 해본 적도 있다. 많지는 않지만 물론 크고 작은 콩쿠르에도 입상 경험도 있다. 아마도 많은 작곡가들에게는(여기에서는 현대음악 작곡가를 말한다) 입선과 콩쿠르 입상은 값진 경험이자 경력이 아닐 수가 없다. 작곡가로서 무대 위에 내 이름으로 작품이 연주되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수상을 하게 된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한 작품이 입선을 하고 입상을 하기까지 과연 어떠한 기준에서 그 예술성이 높게 평가되는 것일까.


국내 혹은 해외의 저명한 몇몇 콩쿠르는 대부분 심사위원들이 콩쿠르 전후로 공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예선과 본선 작품들의 심사평 또한 공개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작품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들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개된 작품 영상을 감상하면서도 심사평에 동의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1등을 수상한 작품에도 수상하지 못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 많은 음악적 지적들이 있기도 한다.


모든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들 작품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음악적 취향 | taste 을 사로잡는 것은 요리 연구가 백종원의 '마법의 양념장'과 같은 소스가 필요할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한국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젊은 작곡가들이 넘쳐난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자신만의 음악어법이 확실한 작곡가가 있는가 하면, 음악 안에서 멋을 제대로 부릴 줄 아는 작곡가도 있다. 어찌 보면 그들의 작품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의 음악세계를 넘어선 작곡가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다들 수상에 목숨을 걸게 되는 것일까. 나를 알릴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일까.


필자는 매년 올라오는 국내외 수상작들을 즐기면서 감상한다. 심사평도 빠짐없이 다 읽어본다. 그러다가 심사위원들의 이력을 찾아보며 그들의 음악을 들어보기도 한다. 음악을 듣다 보면 작곡 의도를 충분히 나타내며 음악을 표현해 내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필자는 작곡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현대음악을 접한지는 절반도 채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험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조심스럽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작품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이력과 경력이 결코 그들의 음악적 지식이 풍부함을 대변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것을 쫓아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전은 좀 더 이론에 입각한 음악활동이 활발했다면 요즘에는 경험이 함께 겸비되어야 할 것이다.


세대는 늘 교체된다. 하지만 각 세대 안에서는 변하지 않는 그들만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심사위원들의 예술적 기준은 옛 경험에 의한 것들이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의 음악과 부딪히는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필자 또한 새로운 세대와의 대화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이전의 이론과 음악의 형태만을 고집해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개념과 시야를 받아들이며 개량 | improvement 이 늘 필요할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전 세계는 음악적 경계선이 많이 없어진 지 오래다. 음악적 교류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욱더 활발해질 것이다. 그만큼 요즘 새롭게 등장하며 활동하는 신진 작곡가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해질 것이다.

물론 수상을 통하여 인정을 받고 작품 연주를 하게 되는 것만큼 값진 경험은 없다. 싫어할 음악가는 없다.


심사위원의 시야와 이론에 입각한 평가를 기준 삼아서 내 작품의 가치를 매기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어떠한 형태로든 내 작품을 접하게 되는 시선들에 끌려다녀서도 안된다.

예술의 기준과 그 가치는 내 작품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고 서로 간의 융화 작용 | emulsion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어디에 선가는 내 작품의 예술성이 인정되는 시공간이 반드시 존재한다.


현대음악을 작곡한다는 것은 외로움의 즐거움이라고 했었다.

또한 내 음악관 안의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끊임없는 연구, 인내와 지구력도 필요하다.


나만의 작품세계 안에서 나와 맞아떨어지는 음악어법을 하나둘씩 정리해 나가다 보면

예술의 정의가 내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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