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올로케 액션 영화, 스크립터 모집합니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지 한 달쯤 됐을 때 구직 사이트에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영화팀 스크립터를 뽑는다는 채용 공고를 보게 됐다. 중국어를 배워 오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방구석 백수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고 있던 차에 그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홍콩 영화를 좋아한 것만큼이나 텔레비전, 만화, 책 등 뭐든 보는 걸 좋아했던 나는 꽤나 오랫동안 드라마 작가를 꿈꿨었다. 그 꿈을 이루겠다며 대학 때는 방송 아카데미를 다녔고, 졸업한 뒤에는 드라마 작가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역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지 나는 그 아무나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중국어를 막 배우고 돌아온 뒤 마침 ‘영화팀 스크립터’ 채용 공고를 보게 되다니. 어쩐지 ‘영화사 스크립터’가 바로 내가 찾던 일자리란 생각이 들었다. ‘중국어도 쓸 수 있고, 영화 작업도 할 수 있다는데 뭘 망설여? 이참에 현장 경험을 쌓아 보자.’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열심히 이력서를 작성해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메일이 자꾸만 반송되어 돌아왔다. ‘아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스크립터 뽑는다면서 메일을 막아 놨나? 왜 안 가는 거야?’ 기껏 공들여 쓴 이력서를 상대가 읽을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니 괜히 더 오기가 생겨서 메일을 보내고 또 보냈다. 그렇게 열 몇 번쯤 메일을 보냈지만 번번이 ‘메일이 반송됐다’는 메시지만 되돌아왔다.
머리끝까지 스팀이 올라 그냥 때려치울까 싶었으나 다시 마음을 다졌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내 보고, 이번에도 안 가면 깔끔하게 포기한다.’
그렇게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잠시 뒤, 드디어 ‘메일 발송에 성공했습니다.’란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조감독님으로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기쁘면서도 가슴을 쓸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일 안 간다고 관뒀으면 볼 수 있는 면접도 못 볼 뻔했잖아? 포기하지 않길 잘 했네.’
“안녕하세요, 오늘 스크립터 면접 보기로 한 정세경입니다.”
“아, 어서 와요. 특이한 옷을 입고 있네. 중국 전통 의상이에요?”
면접을 담당한 조감독님이 나를 보자마자 입고 있는 옷에 대해 물어 왔다. 지금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의욕이 차고 넘쳤던 나는 면접 날 중국 소수 민족 의상 상의를 입고 영화사에 갔다. 어학연수 기간에 친한 친구들과 한 달 동안 다이어트 시합을 한 끝에 받았던 1등 선물이었다.
중국어 하는 스크립터를 찾는다고 정말 중국 옷을 입고 면접에 가다니, 완전 1차원적인 발상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나마 긴 치마였던 하의는 안 입고 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그 쪽빛 중국 옷 덕에 조감독님의 시선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다.
“중국어는 얼마나 할 줄 알아요?”
“일상 회화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사실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 지르고 봤다.
“우리 제작 부장이 아주 중국인 뺨치게 중국어 할 줄 아는데 마침 부산에 내려갔네, 집에 일이 있어서. 한번 대화를 시켜 봐야 실력을 알 수 있을 텐데.”
“아, 아쉽네요. 근데 안 시켜 보셔도 실력은 괜찮습니다.”
영화사에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니, 내 허접한 실력이 들통 나면 어쩌나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날따라 하늘이 내 편이었는지 제작 부장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럴 때 뭔가 결정적인 말 한마디라도 날려야 하는 거 아닐까?
“조감독님,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들 하고도 면접을 보시나요?”
“그래야죠. 지원자가 많아서 몇 명 더 보고 결정하려고요.”
“조감독님, 그러지 마시고 이 면접, 저까지만 보시죠.”
“예?”
“제가 중국어도 잘하고, 스크립터 업무도 잘할 수 있거든요. 열심히가 아니라 잘할 자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면접 안 보시면 안 될까요?”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당연히 조감독님의 얼굴은 당황과 황당 그 중간쯤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있는 것도,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어학연수 일 년에, 스크립터 업무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가 진짜로 잘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영화사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앞뒤를 잴 여유가 없었다.
그런 어설픈 열정을 예쁘게 봐 주셨는지 다음 날 바로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 살에 얼렁뚱땅 큰 영화사의 스크립터가 될 수 있었다. 보통 이십 대 초반에 일을 시작하는 스크립터들이 많은 걸 감안하면 꽤 늦은 나이였다. 나중에 조감독님께 여쭤보니 정말로 다른 지원자들과는 면접을 보지 않으셨다고 했다.
“네가 보지 말라며? 자신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 그렇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하하.”
아마 조감독님은 나중에 후회하셨을지도 모른다. 큰소리 탕탕 친 것에 비해 내 실력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으니까. 하지만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려면 때론 뻔뻔하고 무모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물론 나처럼 금세 진짜 실력이 들통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일단 기회를 잡는 것이다.
어차피 완벽히 준비된 때란 건 절대 오지 않는다. 그러니 기회를 잡은 뒤에 모자란 부분을 열심히 채워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