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립터를 하겠다며 영화사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햇수로 4년을 일하며 네 편의 영화를 준비했지만 제작에 들어간 작품은 단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가 스크립터로 들어간 작품은 반드시 엎어진다는 유쾌하지 않은 속설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무슨 불운의 아이콘도 아니고 왜 들어가는 영화마다 엎어지는 거지?’
물론 이렇게 들어가는 작품마다 제작이 무산되는 되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고민은 먹고살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들 다 가는 길로 가지 않겠다며 떠난 어학연수였고, 확실히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로 들어서긴 했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길을 얼마나 오래 걸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 나는 영화 두 편이 엎어지고 회사란 곳에 잠깐 취직한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사정이 달라졌지만 2000년대만 해도 영화판은 열정 페이를 강요하는 곳의 대명사였다. 두 번째 영화가 엎어진 뒤 먹고 죽을 돈도 없게 된 나는 번역 에이전시에 취직했다. 또한 거기서 출판사와 프리랜서 번역가를 연결시켜 주는 업무를 주로 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다.
다시 말해 번역할 만한 책의 자료를 만들어 출판사들에 소개하고, 그 책에 어울리는 번역가들을 추천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닌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문득 생각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제시간에 퇴근도 못하고, 적성에 맞지도 않는 전화질을 하루에 몇 통이나 해야 하는 거야? 이 일에 내가 있나? 여기를 오래 다닐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들자 한시라도 빨리 사표를 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어차피 그만둘 거라면 미적거려 봤자 회사에 더 민폐만 끼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팀장님, 저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좀 더 있어 보지.”
“아뇨. 오래 다닐 생각이 없는데 시간만 끌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적성에 너무 안 맞는 일 같아요.”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대신 후임자 구할 때까지 2주 정도 더 근무해 줄 수 있지?”
“물론입니다.”
그렇게 퇴사가 결정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후임자가 들어왔고 업무에 관한 인수인계도 했다.
그런데 당시 나는 고작 한 달 일한 프로젝트 매니저여서 그런지 그만둘 때까지 생각보다 시간의 여유가 많았다. 그때, 마지막으로 맡았던 책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살아 생전에 부자였던 천사 할아버지가 어느 가난한 남자에게 부자가 되는 법을 친절히 가르쳐 주는 내용의 재테크 자기 계발서였다.
번역 에이전시의 프로젝트 매니저는 종종 프리랜서 번역가에게 샘플 번역을 맡긴다. 샘플 번역이란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맛보기로 2, 3페이지 정도 선정해 번역한 뒤 그 책을 출간할 의향이 있는 출판사에 보내주는 걸 말한다. 책의 어느 부분을 샘플로 선정할 것인지는 오로지 프로젝트 매니저의 몫이다. 샘플 번역할 본문을 찾아 책을 뒤적거리던 나는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책 되게 재미있네. 만날 다른 번역가들 샘플 번역 원고만 봤는데 내가 한번 번역을 해 보면 어느 정도 수준일까? 난 번역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실제로 번역을 한 적도 없잖아? 어차피 관둘 때까지 시간도 많은데 심심풀이 삼아 해 볼까?’
당시 나는 하나의 샘플 번역을 보통 예닐곱 명의 프리랜서 번역가에게 의뢰했다. 그런 다음 모든 번역 원고를 모아 편집팀에 넘겼고, 거기서 그 책에 어울리는 번역가 후보를 두세 명으로 추렸다. 출판사에서는 후보들의 원고를 검토해 그중에 한 명을 책의 번역가로 선정했다.
샘플 번역을 여러 프리랜서 번역가들에게 의뢰한 다음 사무실에 앉아 짬이 날 때마다 부자 천사 이야기의 샘플을 번역했다. 분량이 많지 않아 작업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감 기한에 맞춰 프리랜서 번역가들의 샘플 번역 원고들이 도착했고, 일일이 파일들을 프린트해 편집팀에 전달했다. 편집팀 대리님께 샘플 번역 원고를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솔직히 속으로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저기… 대리님, 이 사이에 제가 번역한 샘플 원고가 있거든요. 혹시 번역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체크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세경 씨 거요?”
“예, 번역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제 중국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요, 확인하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사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이 책, 세경 씨가 번역해 보면 어때?”
“예? 뭘요?”
“이 책 번역 말이야. 다른 샘플 원고들 다 봤는데 세경 씨 번역이 가장 좋던데.”
“예에? 제… 번역이 가장 좋았다고요?”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대학에, 중국어 전공자도 아니고, 중국어를 오래 배운 것도 아닌데 내 번역이 좋았다니, 기쁘다기보다는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애가 있다지만 내 스펙은 까놓고 말해 번역 에이전시의 프리랜서 번역가 지원란에 이력서를 넣어 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런 나한테 책을 번역해 보라고?
“한번 해 볼래?”
“저는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인데 괜찮으세요?”
“실력이 있으면 되는 거지. 아무렴 어때? 할래?”
“하…할래요! 한번 열심히 해 볼게요!”
별 뜻 없이 한 사소한 시도가 나의 운명을 바꾼 순간이었다.
번역가 데뷔는 몇 년 동안 외국어를 공부한 사람들도 경력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샘플 번역 한 번으로 번역가가 될 줄이야.
세상의 많은 중요한 일들이 꼭 철저한 계획이나 의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때로는 우연히 혹은 호기심에 내딛었던 작은 발걸음이 나를 전혀 새로운 길 위에 오르도록 만들어 주기도 한다.
당시에는 얼떨결에 시작한 번역이었지만 훗날 나는 그 모든 우연이 나를 번역가라는 운명으로 이끌었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번역가가 된 탓에 내게는 아주 험난한 가시밭길이 사전 예약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