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온다

by 달빛그림자

고작 3박4일 상하이로 여행을 갔다왔을 뿐인데

한국에 돌아오니 그새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물론 아직 더운 기운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며칠 전 큰 비가 내린 뒤로 계절이 점차 달라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작년 여름은 무척이나 무더웠다.

아니 무덥다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

만두를 찌는 찜통 속에서 후끈하게 쪄지는 기분을

느낄 정도의 더위가 여름 내내 계속 됐었다.


그 덕분인지 올해 여름에는

"작년 여름에 비하면 지금 더위는 견딜만 한데."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집에는 쓴 지 19년 된 낡아빠진 에어컨이 있는데

실제로 작년에는 하루에 몇 번이고 에어컨을 틀어 열기를 식혀야 했다.

어머니의 조기교육(?) 덕분에 우리집 식구들은 웬만 하면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틀더라도 한 번에 10분 이상을 틀어놓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작년에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더위에 머리가 돌 지경이 되어

절로 에어컨에 손이 갔더랬다. 그에 비해 올 여름에는 아주 더운 날에만

하루 두어 번 에어컨을 틀었었다. 그것만 봐도 올 여름이 작년 여름보다는

얼마나 수월했는지 알 수 있다.


작년에 여름이 끝나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나는 SNS에 이런 시 한 편을 써서 올렸었다.


아침에 일어나 문밖을 나서니 바람이 분다.

찜통 더위가 준 고마운 깨달음.

가을이 온다.

바람 한 자락에 가슴이 설렌다.

선물처럼 가을이 온다.


얼굴이 시뻘개지고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더위를 겪은 덕에

계절이 바뀐다는 것이, 가을이 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올해 여름이 작년에 비해

얼마나 수월한 여름인지도 비교체험할 수 있었다.


한때 나는 심각한 비관론에 빠져던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가난뱅이든 부자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꿈을 이룬 사람이든 이루지 못한 사람이든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간다. 이 세상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굳이 열심히 살 이유가 무엇이며, 뭔가를 이루려 하거나

꿈을 꿀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도 죽을 텐데 말이다.

당시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나는 모든 것이 의미 없고 두렵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작년 여름 그토록 치열한 더위에 시달리며

계절 하나가 바뀐다는 것이,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이 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극한의 고난이 준 깨달음이랄까.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으며 오히려 내가 가진 것, 평범한 일상,

오늘의 할 일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또한 내 인생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해도

하루하루를 평범하고도 특별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죽음이라면 그것에 집착하는 대신

오늘의 나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꾸 죽음을 들먹이니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선풍기의 1단 바람에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오늘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나는 또 그 변화에 어울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가슴 설레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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