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온 지가 어느덧 6년이 다 되어 간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중간에 잠시 2, 3년 이사를 갔던 적은 있지만
다시 유턴을 했었기에 한 동네에서 30년쯤 살았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6년 전에 이 동네로 이사오게 됐다.
우리집 식구들이 사는 아파트는 옛날 아파트라 구조가 좀 특이하게
생겼는데 안방과 내 방이 마주보고 있고 화장실을 하나 사이에 두고
문과 문으로 이어져 있다. 게다가 내 방 옆으로는 작은 방이 하나 더
딸려 있다. 방이라기에는 미닫이 큰 창을 열고 나가는 곳인데
크기가 작아 온 가족의 창고처럼 쓰고 있다.
아무튼 한 집에 여러 해를 살다보니 방 안에도, 그 창고 같은 방에도
짐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그 창고방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쓸데없는 것들이 쌓였고, 내 방 옷장은 옷을 위로 쭉 쌓아두는
지경이 됐다. 번역을 하는 사람인 만큼 책도 엄청 많은 편인데
책장에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책이 가득했다.
작년엔가 번역한 책들과 번역하고 받은 증정본들을 꽂아두려고
조그만 책장을 하나 더 샀는데도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 옷장에는 몇 년째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옷이 천지고, 책장에도 그 옛날 중국어를 처음 배울 때 공부했던
교재며 테이프가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창고방에는
뭔가를 샀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놔둔 물건 상자며
낡아빠진 이불까지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공간이 부족한 게 아니라 쓸모도 없는데 귀찮아서, 추억이 있어서,
내 게 아니라서 기타 등등의 이유로
묵은 짐들은 치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벌써 몇 달 전부터 낡은 옷들, 안 읽는 책들,
쓰레기나 다름 없는 박스들, 추억이 있다며 괜히 놔뒀던
조카의 물건들 등을 깨끗이 치우고 정리해야겠다는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년 가을부터 번역할 책들이 많아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짐을 치운다는 게 한두 시간 들인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 때문에 짐들을 치우지도 못하면서 내내 마음만 부담이 됐었다.
그런데 최근에 번역도 한가한데다 사흘 전 아파트에 무슨 공사가 있다고
10시간이 넘게 정전이 되면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강제로 마련됐다. '컴퓨터도 안 되고, 불도 안 켜지고, TV도 볼 수 없는데
이참에 짐 정리나 해볼까?'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보다 며칠 전에
중고물건을 방문수거해가면서 얼마 안 되지만 돈도 준다는
업체도 검색해본 터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분연히 일어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옷장을 열고 언젠가 입겠지, 한 번은 입겠지 했던 옷들을 죄다
끄집어냈다. 창고방에 있는 작은 서랍장 속 몇 년째 방치해둔 옷들과
침대 밑 서랍에서 썩어가고(?) 있는 옷들도 구출해냈다.
다음으로 6단 책장에서 몇 년째 맨 위칸을 차지하고 있던
중국어 교재와 테이프들도 끄집어내렸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책들과 책장을 너저분하게 만들던
작은 물건들도 싹 치웠다.
옷들은 차곡차곡 접어 커다란 봉지에 착착 담았고,
책들 중 비교적 최근 책들은 온라인 중고서점에 팔기 위해
따로 신청하고 박스에 담아뒀다. 내 방과 거실 책장을 차지하고
있던 정말 오래된 책들과 전집, 어린이 도서 등은 폐지 가격으로
쳐준다기에 빨간 비닐끈을 사다 뭉텅이 뭉텅이 꽁꽁 묶어뒀다.
책과 옷들의 무게를 재고 방문수거 업체에 온라인으로 신청했다.
마지막으로 나선 김에 끝장을 보자며 방 옆에 딸린 창고방(?)으로
진격했다. 이런저런 물건이 담겨 있던 박스들을 하나로 정리하고,
쓸모 없는 박스는 죄다 끌어냈다. 조카의 그 옛날 일기장이며,
알림장, 그림 등도 파일로 따로 정리해둔 것들만 빼고 다 정리했다.
또 아버지가 보시던 두꺼운 책들도 빨간 비닐끈으로
과감히 묶어버렸다. 심지어 바닥이라도 따뜻하라고 놔뒀던
곰팡이 핀 얇은 고무 매트리스도 100리터 종량제 봉투로
직행시켰다.
맙소사, 이 많은 짐들을 다 정리하고 나니 사흘이 훌쩍 지났다.
처음에는 옷이나 좀 정리할까 하고 시작한 건데
이것만 조금 더 저것만 조금 더 하며 가속도를 붙이다 보니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거실과 내 방, 창고방을
계속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데없이 나 혼자 시작한 일이라 도와주는 가족도 별로 없었다.
'고생스럽게 왜 저래?' 뭐 이런 눈빛들이랄까.
나도 내가 하겠다고 나선 거라 딱히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다.
얼마 후면 추석이니 그 전에 대청소한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팔면 돈도 된다니 동기부여가 절로 됐다.
아무튼 이렇게 사흘에 걸친 대장정 끝에 묵은 짐들을
다 정리하고 나니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뭔가가 쑥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버렸다고 방이 휑해지거나 세상 깨끗해진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리프레시된 것만은 사실이다.
책들도 반듯반듯 제자리를 찾았고,
옷들도 조금 간격을 두고 옷장 안에 걸리게 됐으며,
창고방에는 다시 걸을 길이 뚫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진작 청소하고 정리했다면 보기도 좋고 마음도
편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라도 해야 할 일을 해서 다행이었다.
비단 이 눈에 보이는 옷이나 책, 박스, 낡은 소품들만이
묵은 짐일까? 누구나 살다보면 이 일을 꼭 정리해야지,
처리해야지 하면서도 내내 마음을 괴롭히면서까지
시간을 끌고 있는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일이 바빠서, 그 일을 하려면 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딱히 해도 안 해도 그만이니까, 귀찮아서
각종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그 일들은
마음 속 묵은 짐이 되고 만다.
하지만 막상 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그 일을 어떻게든
하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빨리 가속도가 붙으면서
오롯이 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청소이든 누군가와의 관계 회복이든,
반대로 누군가와의 관계 단절이든 간에 말이다.
아니, 가볍게 언젠가 꼭 한번 먹어보리라 다짐했던
맛집을 찾아가는 일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야지 해야지 수십, 수백 번 생각했던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마음의 묵은 짐을 덜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짐을 덜어냈다고 해서 마음이 갑자기
넓어진다거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묵은 짐을 정리함으로써
부담을 내려놓고 기분을 리프레시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과 산뜻한 발걸음으로
다음 인생길을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마음 속 묵은 짐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