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쨍, 코끗 찡~

by 달빛그림자

어제 아침에는 사나흘만에 잠깐 집을 나섰다.

이번 주까지 책 한 권의 번역을 마칠 작정이라 문밖을 나설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번역 마감 기한은 12월

중순이지만 다음 책과 다다음 책이 기다리고 있어서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결국 이 일도 빨리 끝내야 돈을 받는 건데 평소의

나무늘보처럼 느리게 굴다가는 제때 밥도 못먹을 수

있지 않은가. 본래 이렇게까지 번역 순서가 바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문데 일복이 터졌는지 어깨가 뭉치고 머리가

아플 일만 남았다.


아무튼 사정이 그렇다 보니 요 며칠은 아침부터 밤까지

강행군을 해서 해를 볼 일조차 없었다. 밖에 좀 나가볼까

생각하다가도 불안한 모르모트처럼 거실 언저리만 뱅뱅

돌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렇다고 컴퓨터 앞에서

한눈 한 번 안 팔고 번역에 몰두하는 것도 아닌데 하던 일을

두고 자리를 뜨기가 찜찜했다. 마치 어린 시절 공부도

안 하면서 그렇다고 맘 편히 놀지도 못하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어제 아침은 재활용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는 명분이

있어 밖에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인터넷에 가끔

나오는 컴퓨터와 핸드폰 없이 한달만 집에 있으면 1억을

준다는 무슨 테스트 같은 것도 너끈히 통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할 책 보면서 단어나 실컷 찾고 종이에

번역한 걸 적고 있으면 될 일 아닌가.


아무튼 박스며 재활용 쓰레기를 한아름 안고 밖에 나오는데

아침 햇살이 얼마나 쨍하던지 눈이 부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래 자유를 잃고 갇혀 있던 수감자가 드디어

세상과 마주하게 된 기분이 이런 걸까? 조그만 방, 번역 감옥에

갇혀 책과 씨름하고 컴퓨터와 멱살을 잡다 5분이나마 풀려나

밝은 햇살을 마주하니 코끝이 찡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요번에는 실제 마감일보다 20일 정도 당겨서 마칠 정도로

빡세게 작업하다 보니 햇살 하나가 주는 감격이 더 컸다.

문득 세상에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지나치게 시니컬한 사람이라 공기 한줌, 햇살

하나에 감사할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어제 아침은

이 햇살 하나도 거저 얻는 것이 아니며 늘 볼 수 있는 게

아니란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번역을 마무리하고 하루이틀 수정을 한 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면 바로 다음 책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또 번역 감옥에 갇혀 비타민D가 부족해질 때쯤이면 나는

또 다시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음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햇살 쨍, 코끗 찡해질 그날을 위해 힘내자, 파이팅~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 지구인, 우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