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때리고 싶은 날

by 달빛그림자

번역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작업 같지만 생각보다 체력과

집중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글을 쓰는 일은 소위 말해

필(feel)을 받으면 신명나게 몇 페이지씩 막 써지는 날도

있다지만 번역은 그렇지 않다. 물리적으로 하루에 몇

페이지 이상 힘들다는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작업을 너무

미루다 보면 나중에 몇 배로 고생하게 되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래서 매일 꼬박꼬박 성실하게 번역하는 게

다른 무엇보다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필수조건이다.

하지만 번역가도 사람인지라 초반에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 쉽지 않다. 부산스럽게 이 일도 했다가 저 일도

하며 작업만 피해 딴짓을 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마음이 초조한데도 몸은 이미 허튼

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결국

이러다 끝장(?)이 나겠다는 각성이 오면서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게 된다.


내가 바로 지금 그 각성의 단계에 와있다. 계약서를 쓰고도

며칠 게으름을 피우고, 좋아하는 작가의 새 책 출판기획안을

쓰며 시간을 또 며칠 후루룩 말아먹다 이러면 망하겠다는

직감이 왔다. '이번 주, 다음 주에 집중하지 않으면 계획했던

날짜에 마감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요 며칠 나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번역 작업을 하다

보니 고관절이 쑤시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깻죽지가 아프고,

골이 딩딩 울릴 것처럼 띵한 기분이 든다. 이런 날은 어쩐지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멍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하다 보니 직업병처럼 사전을 찾아보는 버릇이

있는데 '멍때리다'는 붙여쓰기를 해야 한다.

결국 이 '멍때리다'란 신조어는 '멍하다'란 형용사에서

비롯됐을 텐데 사전을 찾아 보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반응이 없다.'란 뜻과 '몹시 놀라거나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얼떨떨하다.'란 뜻이 함께 있다.


물론 팔다리가 쑤시고, 골치가 아픈 오늘 같은 날에 내가

하고 싶은 멍때리기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가만히 아무

반응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이다. 멍때리기는 정신이

흐릿해져 끝내 잠이 드는 것과 다르며 아무 말이 없다

해도 잡다한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와도 다르다. 사람은

잠이 들 경우 꿈을 꾸게 마련이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꿈을 꾸는 건 또 다른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할 일이 뭐더라? 며칠 뒤에 누굴 만나기로 했지?

조카 크리스마스 선물로 얼마를 써야 하나? 마감에 맞춰

일을 끝낼 수 있을까? 내 방 청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머릿속은 더 뒤죽박죽이 되고 정신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멍때리기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에너지가 충전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몸도 생각도 쉬면서 릴렉스하고 있다보면 체력도 차오르고

머릿속과 마음에 새로운 여백이 생겨 하던 일을 이어서

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힘이 된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지 마음에 바늘 두께 만큼의 여유도 없어

멍때리고 있는 일이 드물다. 분 단위로 바쁘게 돌아가는

일복 터진 날은 물론이고 딱히 할 일이 없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멍때리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죽 하면 '멍때리기 대회'가 따로 생길 정도겠는가.

그마저도 제대로 멍때리는 사람이 드물고 딴생각을 하거나

꾸벅꾸벅 졸다 실패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어째서 이렇게 가만히 멍때리기가 힘들까?

이는 잠깐의 지루함도 허용하지 않는 스마트폰의 등장이

미친 영향이기도 하고, 각박하게 경쟁해야 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비극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생긴 뒤 1분의 지루함도 참지

못하게 됐다. 할 일이 없으면 바로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꼭

궁금하지도 않은 인터넷 뉴스를 뒤적이며, 그리 재미있지도

않은 게임을 하고, 어제도 본 TV 프로그램을 다시보기 하며,

전화로 해도 될 말을 쉴 새 없이 카톡으로 쏘아댄다.

이 순간에도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헛헛한

만족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일에 치여 바쁜 날도 마찬가지다. 중간중간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동료와 잡담도 하고, 스마트폰도 하고,

장바구니에 담아둔 옷 한 벌도 결제하고 별별 일을 다 하며

하루를 보내지만 멍때리는 일만은 한사코 거부한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뒤처질지 모른다는 무의식의 불안감이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소모하며 몸과 마음의 여유를 닳아 없애고 있다. 마치

무리하게 계속된 일로 관절이 닳아빠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정신도 휴식과 여유가 필요하다.

아주 잠깐이라고 해도 말이다. 몸의 일부인 관절이

닳게 되면 약이나 치료, 수술을 받으면 되지만 온전한

몸과 정신은 그럴 수도 없지 않은가. 결국 멍때리기는커녕

꼼짝도 할 수 없게 나자빠지지 않으려면 미리 아끼고

여유를 줘야 한다. 성과도 없으면서 부산하고 바쁘게

살아온 우리에게 당장 익숙하지 않더라도 하루에

중간중간 5분, 10분씩이라도 멍때릴 여유를 선물해야 한다.

아무런 움직임도, 생각도 없는 진공 상태라니 어찌 보면

아주 근사하지 않은가.

비싼 물건 가볍게 폼나게 툭 사는 걸 요즘 말로 플렉스라고

한다던데 너도나도 바쁜 척하는 요즘 세상에 나 혼자

멍때리고 있는 것도 몸과 정신을 위한 플렉스가 아닐까.

남들이 웬만하면 할 수 없는 나만을 위한 사치 말이다.


오늘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멍때리기 한번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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