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기
일 년의 절기는 참 정확한 것 같다. 입추가 되자마자 아침 길에 시원한 바람을 맛봤다.
이 얼마만의 시원한 바람인가. 초복과 중복을 거쳐 벌써 말복이다. 아침부터 동생이 전화가 와서는 본인들은 아점으로 삼계탕을 먹는다고, 우리는 말복인데 뭐 먹냐고 안부를 묻는다.
몸에 열이 많은 나는 유난히 일찌감치 찾아온 더위에 지치고 지쳐 초복과 중복을 지나며 한 차례 앓아누웠었다. 얼마나 아파서 끙끙댔는지 몸무게가 3킬로나 쑥 빠져버렸다. 금세 다시 원상복구가 되긴 하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항상 말복을 지나며 몸이 골골대다가 꼭 한 번 아파서 고생을 하고 나서야 가을을 맞이한다. 올해도 어김없었고, 빠른 더위 탓인지 더 빨리 아팠다.
30대까지만 해도 아무리 더위에 지치고 추위가 혹독해도 몸이 금세 적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내 육체는 내 삶의 주기와 일 년의 주기가 맞물리며 사소한 자극에도 더 예민하고 더 강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더 어렸을 때는(젊었을 때라는 말은 쓰기 싫다. 난 지금도 젊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까탈스럽고 여러모로 예민한 성격이었다. 우리 엄마의 말로는 아주 지랄 맞은 성격이었다. 대학 때는 하얗고 작고 언뜻 순해 보이는 눈이 크고 동안인 나를 아무 생각 없이 대했다가 무섭고 거세게 물렸던 동기와 선배들은 나를 지금까지도 쌈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내 정신, 즉 내 성질은 그 예전에 비하면 정말 무던해진 것 같다. 놓을 건 놓고 잡을 건 잡고, '비교적' 사소한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그 '무던해졌다'는 상태는 어디까지나 그 이전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것이긴 하다. 그 강도가 약해지긴 했지만,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러니 가끔 나의 예민하고 까탈스러움을 보며 투덜거리는 남편에게 나는 항상 '내 옛 모습을 당신이 못 봐서 그런 거야, 그때보다 무던해진 거니 감사히 여겨'라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한다.
무던해진 정신과 달리 빠릿빠릿했던 몸은 이제는 조금씩 삐그덕 거리기 시작한다. 살도 잘 빠지지 않고, 단단했던 몸은 물렁거리기 시작하고 말이다.
초복에는 삼계탕을 먹었고, 중복에는 전복찜을 먹었다. 그리고 말복에는 메뉴를 고민 고민 하다가 냉장고 안쪽에 고이 모셔둔 시어머니 묵은지 네 쪽 중 두 덩이를 꺼내 돼지갈비를 넣고 묵은지찜을 했다. 더운 여름에 입맛이 이리도 없으니, 밥도둑이면 최고의 몸보신 음식이겠지. 밥을 한 솥을 해서 네 식구가 다 먹었다. 보통은 두 끼 정도 먹는 양이었지만 한 끼에 다 먹어치운 것이다. 역시 제대로 밥도둑이다. 대충 익은 배추김치도 아니고 시어머니의 귀한 묵은지였으니 국물하나 버릴 게 없다.
어느새 아파서 빠졌던 몸무게는 거의 원상복구가 되어가고 있다. 꼬박꼬박 몸보신을 하며 보낸 삼복을 지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내 삶의 주기가 나 자체의 주기보다 자연의 주기에 점점 더 민감해져 가는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