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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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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날 땐, 스프라이트가 최고지." 조는 동전을 자판기에 넣으며 스프라이트를 힘껏 눌렀다.

스프라이트를 마시면서 이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화날 때의 마음대로 충동적으로 뭔가를 한다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는 걸 조는 잘 알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조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청소부 차림의 한 여자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다.

분명 들어올 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는데, 너무 스프라이트에만 집중한 것이 틀림없다.

"전 미니라고 해요." 그녀가 악수를 하고자 손을 건넨다.

"전 조라고 해요." 조도 어색하게 손을 맞잡는다.

"힘든 하루에요?" 그녀도 이제 보니 스프라이트를 마시고 있었다. 흠, 음료수 고르는데는 센스가 있는 사람이군.

"제 얼굴에 쓰여있나요?" 조의 스프라이트 캔 따는 소리가 휴게실을 시원하게 울린다.

"솔직해, 네, 그래요. 쓰여있어요. 그리고 아까.. 제 귀가 맞는다면 샐리 아가 그쪽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 같더군요."

"아, 샐리아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스프라이트를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신다. 샐리아가 그녀의 목구멍에서 시원하게 가라앉는 것 같다.

"셀리아 때문에 그런 건 분명 아닌 것 같지만.. 뭐가 당신을 힘들게 하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뭐지, 목사님인가,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건가

"그냥... 제가 찾고 있는 게 있었는데.. 오랫동안 찾았는데 좀처럼 찾아지지가 않네요."

"책인가요? 샐리아나 다른 직원들이 책이라면 찾아줄 텐데요."

"아뇨, 아뇨. 책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책에 끼워져있을 법한 거예요. 그러니까 책과 관련이 있긴 한 거죠.

다만, 제가 예상했던 책들은 전부 찾아봤는데 전부 다 헛수고만 해서 그게 문제죠."

"흠.. 뭐, 러브레터 같은 건가요? 둘만 아는 암호처럼 한 책을 정해놓고 편지를 주고받고 하는 그런 건가요?"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요." 조는 스프라이트를 마저 들이키고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계속 머물다간 미니인지 미키인지라는 여자가 계속 말을 걸 것이 분명했다. 조는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일단, 짜증이 스프라이트를 마셔도 싹 가시지 않았고, 시답잖은 대화를 기분도 아니었고 게다가 시간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하루하루가 조에게 너무 아까운 시간이다. 더는 허투루 쓸 시간은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하루하루에 인생의 갈림길이 달려있는

기분이었다.


"힘들 땐 느긋하게 앉아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네, 네" 봐라. 저 여자는 저렇게 느긋하니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거다. 누군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데!

"여기 사는 분인가요? 작가에요?" 조는 뒤돌아서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애매한 입모양을 했다.

".. No.. & Yes" 역시 미니는 잘 못 알아들은 눈치다.

"제 말은 여기 사냐는 질문엔 No, 전 여행객이에요. 한 달 정도 여기에 머물려고 왔어요. 그리고 작가냐는 질문엔 Yes. 네, 저 작가 맞습니다."

"아, 작가로군요." 미니는 뭔가 이해했다는 눈치로 그녀를 쳐다봤다.

"네, 그렇습니다." 조는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만 버리고, 어서 빠져나가야겠다.

"여기에 저녁시간에 와본 적 있나요?"


댕그랑


"뭐라고 했어요?"

"저녁에 여기에 와본 적 있냐고요." 조는 미니가 정말 말상대를 필요로 하나 바다라고 생각했다.

"아뇨, 늘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나 와봤죠." 미니는 일어나 조에게 이리 와보라는 손짓을 하며 그녀를 난간으로 이끌었다.

"저 밑이 보여요?" 조는 미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짙은 네이비색 바닥이 보이는지 묻는 거라면, 네, 보여요. 카펫이 잘 깔려있네요."

"전 여기에 서서 난간에 기대고 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해요."

"저 네이비 카펫을요?" 조는 저 카펫에 특별한 게 뭔가 있는지 다시 내려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잘 봐봐요, 조."

"다시 잘 봤는데 아무것도 없는걸요. 계속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저 별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나요?"

"별과 아이들이라고요?" 조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정말로, 아이들이 있었다.

1층의 양옆쪽으로 책을 읽고 있는 부모와 자식의 모양을 뜬 벤치가 보였다. 그것도 연두색 잔디 위에서 말이다.

"그리고 별은..." 조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얀색 샹들리에가 흔들리며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이번엔 조는 미니의 말처럼 아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난간을 잡고 좀 전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정말로 미니의 말처럼 샹들리에와 네이비 카펫은 어느새 하얀 별을 품은 밤하늘로 변해 있었다.

조는 순간, 멈춰서 자신의 머리를 스치는 한 장의 그림을 떠올렸다. 조가 8살 때 아빠에게 처음으로 준 생일선물인 한 장의 그림이었다.


"아빠 이것 봐봐. 아빠 주려고 그렸어."

"오늘 하루 종일 조가 당신 선물 준다고 열심히 그렸어. 나도 보여달라고 했는데 절대 안 보여준 거 있지."

엄마가 조를 안으며 볼을 사랑스레 꼬집었다.

"와~ 조가 아빠 주려고 선물을 준비했어? 엄청 기대되는데. 아빠에게 조가 뭘 준비했는지 한번 볼까?"

조가 엄마의 도움을 받아 묶은 빨간 리본이 사르르 풀리며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라색과 남색을 섞은 밤하늘, 연두색 잔디와 초록 잎으로 무성한 나무. 그리고 그 밑에 앉아 책을 읽는 아빠와 딸

이것이 6살 조가 아빠에게 원하는 것이었다. 그림을 찬찬히 훑어보는 아빠의 무릎에 조가 다가와 앉으며 같이 그림을 바라봤다.


"아빠는 집에 잘 없잖아. 그래서 밤하늘을 보면서 그렸어. 내가 아빠는 밖에 나가서 자면 침대 없는데, 어, 그럼 아빠는 어디서 자냐고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엄마가 아빠는 따뜻한 바람이 부는 들판 위에 잔다고 했거든. 그래서 내가 아빠 무섭지 말라고 별도 많이 그려줬어.

아빠 혼자 밖에서 자면 무섭잖아."

"그래서 별을 이렇게 많이 그린 거야? 나무에도 있고 들판 위에도 있고?" 엄마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의 눈물을 훔쳤던 것 같다.

"이건 아빠가 조에게 책 읽어주는 거야?" 아빠가 손가락으로 책을 읽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응, 책 읽어주는 거야. 한 번도 아직 아빠 나한테 책 안 읽어줬잖아."

"오늘 밤 아빠가 책 읽어줄까?" 아빠가 조의 볼에 뽀뽀하며 묻는다.

"응! 책 읽어줘! 책 읽어줘! 읽어줘!"



'그림대로라면..'

조는 1층으로 뛰어가듯 내려가 먼저 설치되어 있는 4대의 벤치를 샅샅이 뒤졌다. 움직이고 밀고 들고 이리저리 찾았지만 벤치엔 없었다.

연두색 바닥 밑에도 먼지뿐, 반짝이는 건 보이지 않았다.


"이봐, 아가씨. 지금 당신 뭐 하는 거야?"


없을 리가 없는데.. 벤치가 아니라면


리리링


여닫는 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아름답게 흔들리는 샹들리에. 조는 고개를 들어 샹들리에를 올려다봤다.

하얀 발레복을 입은 발레리나처럼 몸을 움직이는 샹들리에. 조는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가 내가 저 샹들리에를 파괴하길 바랐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조는 고개를 내려 카펫을 바라봤다. 샹들리에가 바닥에 비치는 곳. 희미한 하얀 별이 그녀를 향해 반짝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조는 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카펫을 바깥부터 돌돌 말았다.

"아가씨? 미스? 미스? 내 말이 안 들리나? 당신이 경비야 아님 새로 온 청소부야, 뭐 하는 거야?"

경비가 조의 팔을 붙잡고 끌어내려 할 때, 위에서 지켜보던 미니가 소리쳤다.

"미키! 미키! 그녀를 놔줘. 그녀는 지금 뭔가를 꼭 찾아야 하거든." 미키 & 미니. 둘이 같은 곳에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군.

"찾긴 뭘 찾아? 여기에서? 카펫 밑에서? 나랑 장난해, 미니?"

"나는 모르지. 하지만, 그녀는 알아. 반드시 찾아야 해."

조는 있는 힘을 다해 무거운 카펫을 돌돌 말았고, 이는 도서관의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데 충분했다.

아까 자신에 고함을 치던 샐리 아는 저 여자가 진짜로 미친 여자였다며 혀를 끌끌 차고 돌아갔지만 조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펫의 별들이 정말 그녀의 눈앞에 왔을 때, 조는 금빛의 뭔가가 밑에서 반짝이는 게 보였다.


"이건...."


조는 금빛을 뿜는 퍼즐을 뒤집어보았다. 뒷면엔 보라색 밤하늘과 별들이 그려져있었다. 조는 그날의 그림을 꼭 닮은 그림을 보니

북받치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지만 치솟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드디어 찾았어... 드디어.."


주위의 사람들은 조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퍼즐이 자신을 찾으러 온 주인의 눈에만 반짝여서이기도 했지만,

왜 그녀가 그렇게 이 퍼즐을 찾고 싶어 했는지, 이 퍼즐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그렇게 그녀가 이 퍼즐을 절박하게 찾으려 했는지는 오직 그녀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서야 세상의 보물이 어떤 식으로 주인을 부르는지 조금은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기분을 지금 가장 나누고 싶은

단 한 사람에게 조용히 전했다.


"이제 찾았어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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