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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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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좋은 날이다. 조는 보도를 밟으며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글자들이 자신의 머리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팔로 춤을 추며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비처럼 날아드는 아이디어들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지만 작가들에게도 다 개인의 취향이란 게 있는 법이다. 어떤 작가는 철저하게 혼자여야 글이 써지고 (심지어 가사를 돕는 가정부마저도 그때만큼은 내쫓는다고 한다.), 어떤 작가는 일부러 소리를 들어 카페의 문을 열거나 공원을 찾는다. 어떤 작가는 설거지할 때가 아이디어 구상하기 좋은 때라고도 한다. 또, 누군가는 철저하게 사방이 어두워야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며 낮에 창문도 빛 한 점 안 들어오게 커튼으로 막아버린다. 하지만, 누군가는 어둠에서 동이 트는 시간대로 가는 힘을 빌려야 글이 써진다. 이렇게 작가는 각자의 취향대로 살고, 취향을 묻혀서 글을 쓰는 법이다. 조는 적당히 기분에 맞춰 글을 쓰는 편이었다. 물론, 낮과 밤이라면 모두가 잠든 조용한 밤 시간대가 좋았지만 수면시간을 어기면서까지 어둠에 매달리고 싶어 하진 않았다. 그럼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고, 이는 건강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흔히 글을 쓰는 것을 마라톤에 비유했다. 즉, 글은 길게 달려야 하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이다. 글은 삶을 담았다. 시작할 땐 내가 과연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내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도 알 수 없는 거지만 가는 동안 잘 챙겨가며 계속 해나가야 한다. 삶도, 또 글도. 조는 이런 면 때문에 글을 좋아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배워나갔고, 건강을 유지했고 삶을 한 발짝 더 알아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는 이번 기회에 더 글이 좋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이렇게 글을 쓰는 것에 매달리지 않았다면 클루 브린에 올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에 매달리면 그 생각은 잠자코 듣고 있다 반드시 다음 문을 열어준다.

조는 또 하나의 삶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기념관의 계단을 올랐다.


'메리 & 윌리엄 기념관'


조는 기념관의 이름이 새겨진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엄마 아빠의 결혼식 사진처럼 두 분이 손 꼭 붙잡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두 분이 함께 서는 걸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림이 잘 그려지진 않았지만 조는 반드시 그런 날이 또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겉에서 보기와 같이 내부도 비교적 아담했다.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마도 외곽 쪽에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기념관이라면

오랜만 하잖은가? 아마도 이름이 '메리 & 윌리엄'이어서 그런가 보다. 차라리 평범하게 <글의 마을> 기념관이라고 하면 더 낫지 않았을까.

아마도, 남의 집 일을 기념해놓은 곳이라고 생각해서 그럴 수 있겠다. 조는 아빠의 작명 센스가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캡틴이라도 이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다. 조는 전시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전시품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aika 마을 외에 전시품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다.


'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한 라틴 작가의 글이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말이다. 조는 그 희망이 적어도 몇백 개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삶은 적어도 몇백 번이나 새로 피어날 수 있을 테니깐. 부디 이 글을 쓴 작가도 몇백 번의 새로운 희망을 얻었길. 글을 포기하지 않았길.

조는 카렌, 제임스, 파트리크, 니코스 등 이곳을 스쳐간 전 세계의 다양한 작가들의 헌정 작품을 찬찬히 훑어보며 그들의 작품에 매료된 자신을 발견했다. 이렇게나 세상에 자신을 수놓고, 자신을 세상에 수놓으려는 작가들이 많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조는 이런 작가들을 볼 때마다 펜으로 세상과 싸우는 사람이 자신 혼자만 아니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멀리 가는 길은 누군가와 함께일 때가 좋다. 그것도,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와 말이다. 그들이라면 조를 이해해줄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조는 갑자기 그들의 사이에서 피어나는 다이앤이 보이자,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다음 전시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어디지?'


다음 관으로 향하려면 컴컴한 복도를 따라가야 하는 것 같다. 조는 놀래는 것만 안 나오길 속으로 바랬다.

그렇게 조금 천천히, 천천히 걷고 걸으니 빛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한 사진이 조의 눈에 들어왔다. 여러 사람들이 저 사진을 둘러싸고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 대체 무슨 사진이길래 저러는 걸까? 조는 앞사람과 부딪치지 않도록 서서히 앞으로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그리고 마침내 긴 복도를 나왔을 때, 조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모인 저들과 달리 사진 속 한 쌍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조.

들어오기 전, 기념관 앞에서 바랬던 그것이 지금 조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엄마 아빠가 손을 잡고 저 앞에서 그녀를 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조가 여기에 올 거란 걸 알았던 마냥, 긴 복도를 빠져나올 거란 걸 알았던 마냥. 조는 괜히 쑥스러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긴 터널도 아니었는데요, 뭘. 하긴, 어두워서 좀 무섭긴 했어요. 제가 어두운 건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조는 다시 엄마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같이 웃어주는 기분이 들어 조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약간은 뭉클해졌다.

조는 엄마 아빠 얼굴에서 고개를 돌려 다른 전시품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지금 있는 전시관은 <글의 마을>의 캡틴인 아빠를 소개하는 방인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과 아빠의 업적들 (모험을 다니며 모았던 수집품 포함) 그리고 가족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는 천천히 돌아보며 그동안 aika 마을을 떠나와 잠시 잊고 있던 집에 온 기분을 느꼈다. 집에 온 기분이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기분이다.

당신이 어디에 있던, 돌아갈 곳, 돌아갈 품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감사해야 하는 일이다. 아마 아빠도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조는 결혼기념사진과 가족사진을 가장 사람들에 눈에 잘 띄도록 벽에 걸어둔 아빠를 떠올리며 분명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는 한때 아빠가 자신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세계를 누비느라 가족에 돌아오는 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아빠한테 가족은 중요하지 않는 것 아니냐며 아빠에 화를 내기도 했었다. 조는 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아빠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빠를 이해할 수 있는 말 한마디라도'


조는 뭔가가 안에서 북받치는 기분이 들었지만 굳이 꺼내고 싶진 않았다. 이곳엔 사람도 많거니와, 아직 그렇게 늦진 않았으니까.

아빠가 지난 십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그녀에 가까이 와있다. 이제 그들이 서로에 닿으려면 얼마 멀지 않다는 말이다. 너무 늦어버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서로를 놓쳐 영원히 볼 수 없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벌써 오늘 퍼즐도 2개나 맞췄다. 이제 다음 3번째부터 맞추면 된다.

조는 자신이 기념관에 온 목적을 찾으러 방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가족관이라면 분명 이곳에 있을 것이다. 바로, 그녀가 발표했던 책 2권이 말이다. 조는 하나하나 전시품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그리고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광장에서 나들이할 때 사진은 좋다.

그러나,

내가 방 안을 핑크색 존슨즈베이비로션으로 물들이고서 좋아하는 사진,

내가 처음 유치원에서 마카레나 댄스를 출 때 사진,

그리고 발레 할 때의 사진(대체 저 때 촛불은 왜 들었단 말인가? 아마 성스러운 기분을 내고자 선생님이 시켜서 그랬을 것이다.)

은 대체 왜 굳이 전시해놓는단 말인가. 이곳은 아빠한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건가? 오프라인 SNS인 건가?


조는 얼굴을 잽싸게 가렸다. 자신의 얼굴이 버젓이 담긴 사진들이 너무 많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분명 내가 aika 마을에 산다고 SNS도 안 하고 사는 줄 아는가 보다!

조는 누가 알아볼까 얼굴을 계속 가리고 책으로 보이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전시해놓은 자신의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듣고 싶던 아버지의 말 한마디도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딸이자, 유망한 작가인

조 라이터(Joe Writer)의 저서


'글쓰기에 완벽한 날' & 가족의 삶'


(조, 훌륭하다,

널 믿으렴,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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