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이런 밤에 또 내가 있다
자정, 오늘과 내일의 사이 그리고 스탠드 하나 켜진 어두우나 어둡지 않은 나와 닮은 방.
피곤한 몸은 '자야 내일 하루를 또 버티지' 라고 말하지만
머리는 '그래도 뭔가는 써야지' 라며 또 내 몸을 달랜다.
'영화감독은 영화를 찍어야 감독이다' 라고 아무개 감독이 말했듯,
작가도 글을 써야 작가라고 할 수 있기에,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가라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알고 있기에 오늘이란 하루의 끝에 난 또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생(生)이란 주제로 쓰는 이번 연재는 사는 동안이라면 매번 날 따라다니는,
의식하든 안 하든 항상 날 자극하는 가장 무서운 주제일 것이다.
이렇게 늘 날 놀래킬 준비하는 '날 것'의 앞에서 난 뭘 할 수 있을까.
어느 밤, 문득 책상 앞에 앉아 '구겨진 종이'라는 주제로 시를 쓴 적이 있다.
내 책상 옆 쓰레기통, 정확히는 그 주변에 쓰레기통에 '골 인'되지도 못한
구겨진 종이들이 쌓였을 때, 물끄러미 바라보다 썼었다.
항상 작가는 자신의 삶을 무언가에 투영해서 본다.
그렇게 해서라도 소재를 찾아 뭔가를 쓰고 싶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난 그 '구겨진 종이'에 날 투영해서 시를 썼었다.
언제까지 살지 모르는 내 삶의 전체가 '하얀 종이'라면
내가 그 위에서 하는 행위는 아마도 비뚤하게 쓴 글씨,
그리고 그 글씨가 맘에 안 드는 난 이를 구겨버리고 싶다고 매일 생각한다.
구겨버리고 싶다, 아니 괜찮다
구겨버리고 싶다, 아니 정말 괜찮다
구겨서 던져버리고 싶다, 아니 정말 이 정도도 괜찮다
이미 구겨진 것, 다신 보고 싶지 않다
구겼다, 구겼다 폈다, 다시 구겼다, 구겼다 던졌다
요즘 내 마음이 이렇다
.
.
프롤로그(prologue), 소설의 앞머리에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쓰는 앞머리를 일컫는다.
요즘 평균수명에 내 나이를 비유한다면, 아마 난 내 인생의 프롤로그나 썼을 것이다.
프롤로그마저도 성에 안 차다니, 내 인생, 어찌 하면 좋을까
[구겨진 종이]
지금, 당신에게 날 보여준다면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얀 종이에 날 써보자 했지만
한 줄도 맘편히 쓰질 못했다
난 별로 볼 것도 없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난 결국 혼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밤엔 난 또
솔직함을 구겨버리고
웃음이 나오지도 않는 밤에
웃어버리는 것을 택한다
.
.
지금, 당신에게 이런 날 보여주면
당신은 날 뭐라고 생각할까
거울에 비춘 나와 눈이 마주치면
피해버리는 내가 오늘밤도 홀연히
별로 빼앗길 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의 텅 빈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면 오늘밤엔 난
그래서 오늘밤엔 난 또
비어버린 가슴을 던져버리고
거짓말로 가득 채운 가슴으로
무리에 섞여버리는 것을 택한다
따스함과 차가움을 구별할 수 없는 밤
웃음과 울음이 한 데 섞이는 밤
눈물방울과 술방울의 맛이 같은 밤이
모두 하얀 종이를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