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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Nov 19. 2023

우리는 예술을 하고 있다 #5

내가 결정하는 시작점, 안젤름 키퍼

이번 목요일은 하루 종일 대전에서 보냈다. 오후에 있는 카이스트 행사를 중심에 두고, 대전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동선을 짜봤다. 점심식사 후 다음 일정인 네 시까지 약 2시간 정도 혼자 시간을 낼 수 있어 헤레디움에서 하는 독일 현대미술의 상징인 안젤름 키퍼의 <가을 Herbst>전시를 다녀왔다. 비가 꽤 많이 오는 오후였다. 




헤레디움은 1922년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전지점이었다. 100년이 지난 후 2022년 한 민간 재단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리뉴얼하였다. 국가등록문화재기도 한 이 건물에서 안젤름 키퍼의 국내 첫 전시를 개최했다. 왜 접근성이 좋은 서울이 아닌 이 공간이었을까? 


안젤름 키퍼를 처음 본 것은 비엔나의 알베르티나 미술관, 그리고 잘스부르크의 A.E.I.O.U에서 였다. 안젤름 키퍼는 생존작가로서 신표현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데, 직업으로서 문인과 화가를 고민할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시'가 자주 등장 하나보다. 오스트리아 방문 당시는 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안젤름키퍼


헤레디움 건물 2층 전시장은 벽을 둘러싼 그의 작품 중간에 벽돌로 설치된 작품이 있다. 모로코산 붉은 흙에 나뭇가지를 넣어 구운 100여개의 흙벽돌 이다. 작품의 이름도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이다. 릴케의 시 가을날의 마지막 문구라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 파괴된 것 같이 보이는 이 작품을 그냥 지나쳤다가 작품설명을 보고 다시 발걸음을 되돌렸다.  


안젤름 키퍼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을 무너진 주택가와 잔해들 속에서 지냈다. 그런데 이 폐허 속에서 놀았던 기억이 오히려 즐거웠다고 한다. 그에게 폐허는 전쟁의 상처가 아니었다. 인류가 저지른 파괴였지만, 재건의 시작점이었고, 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키퍼에게도 그랬다. 시작과 끝에 대한 관점이 보편적일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계속되는 시작과 끝의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도, 그래 결국에는 우리다. 




오후 네 시에는 카이스트 기술경영학부 요청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제자격증인 CFA(Chartered Financial Analyst) 소개 겸 사모펀드 직무에 대한 설명을 하는 자리를 가졌다. 학부 1학년 생에서부터, 대학원생까지 50명 남짓한 학생들 프로필이 다양했다. CFA 자격은 취득하는 데 보통 3-4년 정도 걸리기 때문에 학생들 입장에서는 기회비용에 대한 큰 결정이다. 너무 이르다는, 또는 늦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고 MBA 사이에서 고민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준비해간 자료를 발표하기 전 안젤름 키퍼의 벽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이 남기고 간 폐허를 시작점으로 본 안젤름 키퍼. 학생들이 어떤 선택을 하던, 그 지점이 올바른 시작점일 것이고 사회의 사고방식이 정한 보편적인 시작과 끝의 관점과는 다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결국 모든 전문자격이 빛을 발하는 때는 올바른 우리의 태도와 만났을 때가 아닐까


결국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돌아보면 학생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변곡점에 서 있었다. 내 두 발은 아래는 폐허 같은 곳일 때도 있었고, 밝은 햇살 아래였던 적도 있었다. 그게 어떤 상황이었던 거기가 시작점이었다. 여기가 시작이라는 결정은 결국 내가 했던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안젤름 키퍼는 왜 대전의 헤레디움을 선택했을까?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현재의 복합문화공간으로의 시작과 함께하기 위해, 전시 제목은 <가을 Herbst>으로 지었지만 계절의 변화는 무언가의 끝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가을 (Herbst, 1906)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하늘의 먼 정원들이 시들어 버린 듯.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다른 별들에서 떨어져 고독에 잠긴다.

우리들 모두가 떨어지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덜어진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두 손에 받아들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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