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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Dec 22. 2023

Autumn leaves

필라델피아, 맨하튼, 그리고 북정마을을 통한 경력에 대한 짧은 회고

Chapter 1. 필라델피아

2017년 4월 필라델피아 출장. CFA한국협회 대표로 참석하는 Global Society Leadership 컨퍼런스였다. 서른이 훌쩍 넘어 출장길로 밟아본 미국땅은 이제서야 내가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있구나,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딱 10년 전 CFA(Chartered Financial Analyst)시험을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서른 살 생일은 맨하튼에서 맞이하자는 다짐을 했었다. 예상 기간보다 4년이 지난 후에 나는 CFA시험을 최종 합격하였다. 7년의 수험기간 이었다.  


남들 보다 조금 늦게 금융회사 취업준비에 뛰어든 컴플렉스를 메워보고자 시작한 공부였다. 취득하기 쉬운 국내 자격증 몇 개를 합격하고, 이왕이면 가장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고자 고른 게 미국 자격증인 CFA였다. CFA합격 후 뭔가 드라마틱한 인생, 경력의 변화를 기대했지만 합격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너무나 평범한 내 일상에 대한 실망감도 잠시, 나는 금방 적응해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에 충실한 회사생활을 했던 내게 Generalist 와 Specialist 진로 사이에서 고민해야 할 시기가 왔다. 당시 다니던 회사의 미래 전망이 어두워 대주주가 회사 매각을 선택했고, 나는 회사를 대표하여 M&A TFT에 들어가 비밀리에 매각절차를 진행해 나갔다. 결국 회사 매각은 실패했고, 회사는 Plan B로 계획했던 인력을 포함한 내부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내가 있던 부서가 통폐합되었고, TFT업무가 끝나고 복귀할 부서가 마땅히 없던 내게 회사는 너는 구조조정 대상이 아니라며 그 동안 해보지 않은, 투자금융 Specialist로서의 성장경로로 생각해보지 못한 부서로 이동을 제시하였다. 당시 나는 리스크본부인 기업심사팀에 있었고, 영업본부였던 투자영업팀으로 보내 달라고 담당 본부장에게 요청하였지만 내가 해당 팀으로 복귀 시 한 명이 구조조정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거절의사를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결정했었다. 이직할 곳이 없어도, 정규직이라는 (남들이 볼 때) 안정적인 자리를 내려 놓고, Generalist로 이 회사의 조직원으로 성장하는 미래는 내 것이 아니라는 결론과 함께 희망퇴직을 하였다. 몇 사람의 만류와 회사의 회유를 뒤로하고 천천히 내가 왜 금융업을 택했는지, 왜 CFA시험을 힘들게 준비했는지, 진짜 내가 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고민해가며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영업경험이 없던 것과 관련 네트워크가 없다는 것은 큰 결점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제일 컸던 구직자로서 불리함은 현재 직장이 없다는 것.  


무너지지 않는 루틴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 한 교육기관에서 하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종일 영어로 배우고 이야기하는 수업 과정을 신청했다. 퇴직 이틀째 부터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할 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9시 까지 신사동 학원으로 향했다. 6시에 수업을 마친 후 집에 와서 이력서를 작성을 하거나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일상을 채워 나갔다.


이왕 Specialist로 살기로 결정한 것, 여의도로 진출해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투자은행(IB)부문, 사모펀드(PE) 부문은 서류통과도 힘들었다. 구직기간이 길어지면 안된다는 판단, 그리고 조금 돌아가도 과정 속에서 배움이 있을 거란 확신은 당시 10년 정도 직장생활을 통해 체득했던 터. 취업 확률이 높은 리스크 심사 분야로 지원을 했고 여의도의 한 증권사 심사팀에 취업을 하였다.  


이 때부터 여의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당시까지 부동산금융 경험이 없었다. 주로 기업 대출(여신)심사, 그리고 짧게 사모펀드(PEF)에 출자심사를 경험해 봤던 정도. 그러나 내가 취직한 회사는 부동산금융회사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의 모든 포트폴리오가 부동산금융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는 지방부동산까지 개발열풍이 불던 시기였고, 막 아파트가 착공, 준공되어 SM, 삼정, 호반, 우미같은 지역 건설사들이 고속성장을 하던 때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축은행 사태로 저축은행들이 부동산금융에서 실적이 주춤하고, 이 공백을 증권사가 메워가던 상황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부동산금융을 배우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퇴근 후 부동산 금융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을 다니고, 책을 읽어가며 학습했지만, 좀처럼 나에게 업무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나를 아직 못 미더워하는 팀장의 시선에 적응해야 했고, 낯선 용어와 친해져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밀려드는 프로젝트에 나도 조금씩 참여를 하게 되었고, 이제 좀 여의도생활을 통해 내가 Specialist로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지내던 중 해외 출장기회가 왔던 것이다.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나는 어렸을 때 이민을 갔던 이모의 딸인 두 친척 누나가 있다.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연락만 나누던 사이. 그래도 어머니와 이모가 가깝게 지내던 터라 종종 연락을 나눴다. 두 누나는 뉴욕 맨하튼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에서 연락을 통해 토요일 일정을 모두 비우고 맨하튼에서 누나 가족들과 점심약속을 잡았다.  


Chapter 2. 맨하튼

당시 맨하튼은 세번 째 방문이었다. 한 번은 2005년 혼자 여행을 갔었고, 2014년 지인 결혼식 참석 차 방문하였다. 출장길은 처음이어서 이번 방문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금요일 밤 업무를 마치고, 호텔에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누나들과 약속이 있는 레스토랑은 브로드웨이 근처였고, 필라델피아에서 암트렉으로 맨하튼 펜스테이션까지는 약 1시간 반이 걸렸다. 그리고 오후에 함께 출장을 왔던 동료가 맨하튼으로 넘어오기로 하여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누나들과 점심약속 전이었다.  


출장, 여행지에 가면 항상 이른 아침 조깅을 했다. 여행지에서의 조깅은 아무도 없는 유적지를 홀로 뛰면 느낄 수 있는 약간의 공허함과 적막함을 주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트레비 분수, 판테온을 경험했다. 부동산금융을 했던 나로서 출장지(주로 도시) 내 투자할 건물을 포함한 인근 부동산을 짧은 시간 안에 서류 상 스터디 내용과 비교하고 현장을 통해 학습하고, 또 그걸 누군가에게 설명을 했어야 했다. 출장지에서 조깅은 도시를 몸으로 경험해 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구, 학습을 해야하는 업무적인 니즈의 접점에 있는 루틴이었다.


Chapter 3. Autumn leaves

그래서 이른 아침 필라델피아에서 암트렉을 타고 펜스테이션에 도착해 센트럴파크를 가로질러 할렘가까지 뛰어가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할렘에서 브로드웨이를 통해 레스토랑을 향해 걸으면 어느정도 누나들과 점심약속시간을 맞출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을 곳도 없었으니 조깅 복장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맨하튼에서 조깅, 산책에서 꼭 듣고 싶은 음악이 있었다. Autumn leaves. 특히 빌 에반스가 연주한 버전으로. 이렇게 나는 펜스테이션에서 센트럴파크를 지나 할렘까지 11km를 뛰었고 빌 에반스의 Autumn leaves를 들었다. 그리고 할렘에서 컬럼비아대학을 지나 브로드웨이를 천천히 걸으며 다시 Autumn leaves를 들었다.


2007년 10월 처음으로 코스피가 2000포인트를 돌파했다. 2차 세계대전 전의 독일경제의 호황 같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를 앞둔 한국의 2007년은 화려했다. 이런 흥분의 도가니 속에 론칭한 미래에셋증권의 경험의 차이 광고. 그 때 배경 음악이 Autumn leaves였다. 다른 회사에 있었지만, 신입사원 입장에서 나에게 제일 전문성이 느껴지는 금융회사 광고였고 동경이 될 만한 대상이었다. Autumn leaves는 그런 광고 속 나를 상상하게 하는, 미래의 더 나은 내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음악이었다. 10년이 지난 2017년 뉴욕. 세계 금융의 수도에서 나는 Autumn leaves를 들으며 천천히 지나온 10년을 떠올려봤다. CFA 1차 시험을 준비했던 때, 그 당시의 다짐, 불합격 후 좌절감과 합격 후의 허무함. 희망퇴직을 하고 나와 고용센터에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그려봤던 미래. 여의도에서의 경력을 시작하며 했던 다짐, 생각과 달랐던 환경, 그리고 또 다른 다짐 등등.



Chapter 4. 북정마을

북정마을에 위치한 산슬비라는 문화콘텐츠 디자인 연구소에서 주선한 한 모임에 참석을 하였다. 산슬비가 위치한 북정마을은 성곽마을이다. 한양도성이 힘찬 붓글씨처럼 스윽 휘갈겨 지나가는 북정마을에는 과거와 현재가 명확히 공존하는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간의 켜가 있다. 산슬비는 그 풍경을 채워주는 콘텐츠 중 하나다. 이날 저녁식사 때 함께한 하모니카, 기타 연주자 듀오가 라이브로 Autumn leaves를 연주하였다.


2007년 신입사원 시절의 나, 2017년 뉴욕에서의 나, 지금의 북정마을에서의 나. 다르지만 같은 내가 만나 묘한 조합을 불러일으킨다. Autumn leaves라는 음악으로. 살짝 와인에 취해 턱을 괴고 연주에 푹 빠져 있던 그 3분 남짓이, 올 해 경험한 최고의 순간 같다. 지금의 생각과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또 앞으로 맞이하게 될 의외의 조합을 기대하며 살아야겠다. 내 인생 키워드중 하나인 Serendipity를 느낄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고 살아야겠다. 어쩌면 Autumn leaves는 소중한 소급, 내 또 다른 자아인 금융인으로서 근본을 찾아주는 음악 아닐까 싶다.


*그림은 DALL-E로 만들어 본 맨하튼에서의 다짐 

https://youtu.be/r-Z8KuwI7Gc?si=Pv6LFmX9BvEYq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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