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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Jan 07. 2024

하루키 이야기

2023년은 나와 이별하기 싫었나 보다. 12월 말 부터 슬슬 올라오던 감기기운이, 업무를 마감하고 가족들과 일주일 정도 떠난 강원도에서 심해졌다. 리조트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하루 축 늘어져 있었더니 조금 움직일 만 했다. 어디 다니지도 못할 거 그간 책이라도 실컷 읽자는 마음으로 못 읽은 이 책을 꺼내 들었다. 무라카미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의 소설 리뷰는 편의점 숫자보다 많을 거고, 난 폴 세잔이 그릇에 담긴 사과의 형상을 확인할 때처럼 날카롭고 비평적인 눈빛으로 그의 작품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만을 담아보려 한다.  


22살 여름 <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그가 쓴 장편소설들은 전부 읽은 듯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단편소설 몇 개와 에세이를 제외하고는 그와 관련된 책은 이상하게 또는 자연스럽게 다 읽게 되었다. 사회에 나오고 서른을 훌쩍 넘겼을 때 나온 <1Q84>, <기사단장 죽이기>는 멋몰랐지만 멋있었던 20대때 읽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댄스 댄스 댄스>, <태엽감는 새>보다는 좀 더 먹먹했고, 또 글을 통해 힘을 얻었다. 20대 보다 조금이나마 인생의 맛을 알아가는 시기라 그랬나 싶다. 


아니면 아마 근 20년 간 느릿느릿 그의 작품을 안고 살면서 느낀 (또는 알아간) 하루키만 소설의 특징들 때문 아닐까. 또 그 장치들을 그의 신간을 읽으며 알아차렸을 때의 기쁨이 꽤 즐겁다. 예를 들어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커피숍의 그녀는 공통적인 신체적 특징을 지녔다. 내가 느낀 하루키 스토리의 특징은 '희망'이다. 또 어려움을 극복하는 주체는 바로 누구도 아닌 '나'. 대부분의 주인공은 무기력해 보이지만 나름 직업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고, 고독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인간관계를 포함한 사회생활은 정규분포의 중간 즈음에 있는 사람들이다. 취향 또한 고급지다. 재즈, 클래식에서부터 올드칵테일까지, 심지어 옷도 잘 입는다. 소설속에서는 무미건조하게 묘사되지만, 20대 때는 오히려 주인공들의 취향에 빠져 나도 그의 소설속에 나온 위스키와 음악을 찾아 들었다. 


<The Bends>앨범을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했던 Radiohead를 그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서 언급한 <Kid A>를 통해 다시 듣게 되었다. 참으로 고마운 하루키씨다. <해변의 카프카>가 2002년작이고, Radiohead <Kid A>앨범이 2000년에 나왔으니 꽤 빠른 업데이트다. 이번 소설에서도 '구글', '소셜미디어' 같은 단어가 등장하니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의 현재도 요즘으로 이어진다.  


자칫 우울해 보일 수 있는 주인공들의 삶이지만, 그들은 각자의 결핍을 몇 개의 매개체 (양사나이, 그녀, 우물, 또 다른 세계 등등)를 통해 알아차리고 극복해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삶에 대한 희망을 남긴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말랑말랑해지는 가슴의 느낌과 어디까지 인지 상상이 안되는 취향의 다양성, 깊이에 감탄하며 따라가보는 재미를 알아간다. 책을 다 읽고 나름 DALL-E를 통해 그의 소설 속 도시를 상상해보고 표현해보기도 했다.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장면은 2부의 커피숍. 두 남녀가, 아니 두 결핍이 만나 하나로 이어지는 과정인데, 그 배경음악들이 너무 좋다. 요즘 아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산책을 즐긴다.   


역 근처 상점가 작은 커피숍을 처음 발견한 날 커피와 블루베리 머핀을 처음 주문한 날 

P434 데이브 브루벡 퀘텟이 연주하는 콜 포터 - Just One of Those things 


뜨거운 블랙커피로 몸을 녹이고, 블루베리 머핀과 조간신문을 읽는 월요일의 소소한 습관

P485 에롤가너 - 파리의 4월 April in Paris 


눈발 날리던 월요일 커피숍에서 하얀 눈을 바라보며 듣는 폴 데즈먼드

P508 데비브 브루벡& 폴 데즈먼드 - You go to my head  


점심시간을 이용해 들어간 커피숍에서

P663 제리 멀리건과 쳇베이커 - 워킹슈즈 Walkin' shoes  




"당신의 마음은 새로운 움직임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해요.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 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결국 이 격렬한 낙하를 받아주는 존재도 나 자신 아닐까. 


*그림은 DALL-E로 만들어 본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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