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는 징역 3개월 형에 처한다” (탕탕탕)
아가야, 아빠는 드라마로만 법원을 보았기에 우리가 하는 소송도 이러한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어. 판사님이 시원하게 판사봉으로 나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모습. 하지만 우리의 전세사기 소송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더라. 판사봉 구경은커녕 법원 근처도 못 갔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송은 지루하기 그지없었고.
전세사기 소송은 어떤 절차로 진행이 될까?
첫 번째는 임차인(세입자)의 내용증명 발송이야. 즉 우리와 같은 세입자들이 ‘전세금을 돌려달라!’라는 전세금 반환에 대한 내용증명을 집주인 주소로 보내게 되는 거지. 그러면 임대인, 즉 집주인은 ‘흠, 세입자가 하는 말이 옳군, 내가 x월 x일까지 당신의 통장으로 송금해 주겠소’라는 답변서를 제출하게 돼.
만약 집주인이 우리의 요청을 인정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집주인은 절대 반환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법원에 소명을 하겠지. 우리 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나 의도도 없다면? 법원의 내용증명이 와도 그냥 무시하거나 무기력하게 바라만 볼 거야. 집주인이 어떠한 선택을 하냐에 따라서 승소 판결까지 걸리는 시간이 달라져. 세입자들의 내용증명에 따라 집주인이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대응하면 무려 ‘6개월’이나 걸리고, 그렇지 않으면 ‘3개월’ 정도 걸린다고 보면 돼. 조금 어렵지?
“아니, 집주인이 그 사이에 자기 재산 다 빼돌리고 도망가겠어요!”
아빠의 설명을 들은 엄마는 분통을 터뜨렸어. 하마터면 찻잔에 담긴 뜨거운 차를 쏟을 뻔했지. 그렇지만 어쩌겠어.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제도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걸.
법원이 지정한 '선고기일'까지 집주인의 아무런 대응이 없으면 법원은 우리의 '승소'로 결론을 내버려. 아빠와 엄마는 100일에 가까운 이 지루한 시간을 기다렸고, 집주인의 무대응으로 결국 우리는 승리했지. 하지만, 승소 판결은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야.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주인이 항소할 수 있기 때문에 또 판결 확정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게 또 2-3주 정도나 필요해.
돈도 문제였어. 아빠와 엄마가 이 소송을 하기 위해 수임할 때 500만 원가량을 썼는데 승소했다고 변호사 측에서 200만 원의 성공보수를 요구했어. 여기서 우리는 주춤했지. 처음엔 우리가 소송을 하게 되면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너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변호사에게 모든 걸 맡겼는데, 생각 외로 너무 큰돈이 나가다 보니 이런 식으로 돈이 계속 나가게 되면 네가 나왔을 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전세사기 한 번에 1,000만 원 이상은 부어야겠더라고.
더욱이 엄마는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불러온 배를 움켜쥐고 한여름에 이곳저곳을 돌며 '당근마켓'을 통해 육아용품을 사들이고 있었거든. 엄마는 신생아 때 필요한 초점책마저 '당근'으로 공수해왔는데, 매번 '당근'을 하는 날이면 온몸에 땀이 흠뻑 젖은 채 집에 오곤 했어. 그리고 지쳐 쓰러져 잠들었지.
두 번째 절차는 무엇일까? 집주인이 그래도 돈을 갚지 않는다면 재산명시 절차를 밟을 수 있어. 법원이 강재로 재산관계를 명시한 재산목록을 제출하도록 하는 거지. 집주인의 재산이 얼마인지 알 수 있다면 돈을 돌려받기가 훨씬 수월할 거야. 세 번째는 집주인 재산을 경매로 넘겨버리는 절차야. 이 것은 두 번째 재산명시 절차와 같이 밟을 수 있어. 물론 각각의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 그리고 집주인이 남아 있는 재산이 있어야 우리가 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되지. 엄마가 만삭일 때 즈음 아빠와 엄마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절차를 남겨놓고 있었어. 그리고 금전적 압박을 받고 있었지.
“여보, 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진행한 게 편하긴 했는데, 솔직히 우리 벌이로서 너무 부담이 되어요. 그래서, 셀프로 재산명시랑 경매매각 절차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내가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해볼게. 우리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봐요."
고민 끝에 아빠가 엄마에게 먼저 입을 열었어. 엄마는 아빠가 고생할까 봐 걱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네가 나왔을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어. 특히 집이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코딱지만 한 14평짜리 집에서 네가 기어 다니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쩌나라는 생각뿐이었지.
“난 자기가 너무 고생할까 봐 걱정돼요. 가뜩이나 회사 일도 많은데... 변호사는 뭐 그렇게 비싸대요? 건건별로 돈을 수백만 원씩 받아가다니...”
아주 돈 파티야 그렇지? 예전에 사법고시 폐지하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만드려고 할 때 많은 반발이 있었는데, 당시 찬성하는 사람들이 로스쿨이 생기면 변호사 수임료가 싸지고, 서민들이 혜택을 보니 어쩌니 하던데 그거 다 뻥이었다는 생각도 들더라.
“그리고, 우리 어떻게든 월세 집이나 또 다른 전셋집이라도 구해봅시다. 안되면 처갓집이라도 들어가서 살지 뭐!”
아빠의 호언장담에 엄마는 실없이 웃으며 콧방귀를 뀌었어.
“아이고, 자기 우리 엄마 아빠랑 살면 엄청 불편할걸요? 처가살이가 뭐 쉬운 줄 아나요?”
“왜? 나 장인장모님 엄청 좋아해요. 장인 장모님도 나 되게 좋아하시는데? 어쩌면 당신보다 날 더 좋아할 걸요?”
엄마는 믿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빠를 흘겨봤어.
“얼씨구? 당신 들어가자마자 일주일 만에 나온다고 할 거예요. 허세 부리지 마세요 선생님~."
우리 집은 전세사기 얘기만 나오면 침울했어. 그런데 이날은 오래간만에 농담도 하고 크게 웃었던 것 같아. 아빠도, 엄마도 어쩌면 함께 있기에 버틸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려울 때 함께 있으니 이겨낼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이었어.
“전세사기 때문에 우리 대출 제한도 걸려서 돈이 묶일 테지만, 안 되면 월세집이라도 살지 뭐! 그러면서 이 긴 긴 마라톤 같은 전세사기를 극복해 봐요."
어찌 보면 대안 없는 대안이었지만, 엄마는 그래도 아빠에게 함께 할 수 있다는 눈빛을 보내줬어.
“아기한테 미안하네요. 남들처럼 좋은 아파트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맘 껏 뛰어놀 수 있는 곳에서 키우고 싶었는데... 집주인만 생각하면 슬프고 화가 나요.”
“아이고 여보, 그러지 마요. 뱃속에 아가가 놀랄 거예요.”
엄마는 배를 둥그렇게 쓰다듬으며 말했어.
“아이고, 엄마가 미안해 아가야. 아무 일도 아니란다”
그래 아가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보잘것없는 시련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