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여자는 피부로 정복한다. 무엇을?

by 한약초콜릿

소녀가 대학에 입학하면 여자로 거듭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얼굴에 올리는 메이크업이다. 화장술이라고 할 정도로 화장엔 감각과 배워서 익히든 천부적이든 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영 젬병이었다. 지금도 딱히 고도의 스킬을 가지진 못했지만 적어도 엉성한 마무리는 벗어날 지경은 돼있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색조와 눈썹모양만 찾아도 메이크업은 안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다행인지, 트렌드라는 게 자연스러움을 외치고 있으니 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한창 캠퍼스를 누빌 시기엔 내추럴은 환자처럼 보이게끔 하는, 하지 않은 것이 나은 기법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화장술은 피부는 두껍고 답답하게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를 덕지덕지 꼼꼼하게 발라 누가 봐도 화장했다는 표시가 나야했고 눈썹은 눈썹산이 또렷해야 했으며 마스카라는 필수였다. 입술은 눈부시게 발광하는 립글로즈가 알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전용제품으로 립라인을 그리고 립스틱을 바르는 부류도 상당했다.
이런 친구가 학기 초부터 딱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는 이른 등교에도 불구하고 세팅된 얼굴과 현란하게 땋아 묶은 헤어를 고수하며 수강을 하러 나왔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혼자였다. 아니, 어울리는 여학생이 없었다는 쪽이 옳은 표현이다. 남학생들 사이에선 그 친구를 예외 없이 발견할 수 있었으니.


우리 동기 여학생들은 그 친구(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A라고 칭하자)와 가까워질 기회조차 없었다. 대다수 수수한 차림과 약간은 서툰 화장으로 낯설게 거울을 대하는 우리와는 대면할 수 없는 어른들만의 세상을 A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남학생들과는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던 거라 여겼고, 이성의 관심을 사로잡은 유일한 여학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그것도 누군가의 생일을 빌어 벌린 술판에서 예상치 못한 증언(?)을 듣기 전까지였다.


안경을 착용하고 눈이 아주 작아 ‘와이셔츠 단추’라는 별명을 얻은 동기 숙희가 술이 들어가자 평소답지 않은 억양으로 당차게 같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 과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 남자들은 예쁘게 꾸민 여자 좋아하지? 그러니까 A에게 사족을 못 쓰지. 웬만한 여자들도 그렇게 화장하면 걔만큼은 예뻐 보여. 그러니까 그렇게 우르르 A에게 몰려들지들 좀 마.”


말소리도 여리고 체구도 작아 움직임도 작은 숙희의 도발에 나를 비롯해 과대도 놀라워했다. 말을 하지 않아 몰랐는데 그간 숙희가 A에게 부러움 비슷한 것이 있었나싶어 의외로 다가오기도 했다. 숙희는 아주 평범하고 조용하게 지내길 좋아하는 유라고 내 멋대로 가름했던 걸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숙희에 대해 안다고 함부로 그랬을까?


“A가 예뻐? 내 눈엔 숙희 네가 훨씬 예뻐.”


엥? 과대가 살랑거리는 어투로 숙희에게 말하며 잔에 남은 술을 의도적으로 말끔하게 비웠다. 그리고 더욱 의도적인 몸짓으로 맥주를 빈 잔에 따르고선 한손에 들고 숙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숙희도 당당하게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 테이블엔 나까지 포함해서 셋이었다. 나만 빠지면 될 자리인 것 같았다.


“A를 우리 남학생들이 뭐라 부르는지 알아?”


“뭐? 여신?”


“여신이라니 말도 안 돼. 2cm야”


“2cm? 그게 뭐야?”

과대와 숙희의 대화다. 내 발언은 없다.


“화장이 너무 두꺼워서 손톱으로 긁으면 2cm는 파일 것 같아서 그렇게 불러.”


“그렇게 비하하면서 왜들 걔 주위에서 어슬렁대?”


“그야, A가 먼저 말을 붙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거지. 스스럼없이 굴거든 A는.”


“어떤 면에서?”


“야, 그걸 어떻게 다 말로 하냐? 그냥 그렇다는 거야. A에게 특별한 마음 가지고 있는 애는 없을 걸 아마? 내가 아는 한은 그래. 근데 숙희 너, 피부 정말 좋다. 뽀얗고 귀엽고.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네가 우리 과에서 가장 예쁜 피부를 가졌어. 정말 예뻐.”


내가 왜 여직 자리를 뜨지 않고 이 대화를 엿들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서 숙희는 느닷없는 피부칭찬에 감전되어선지 우리 둘은 얼음처럼 꼿꼿해져있었다.


“숙희는 화장 진하게 하지 마라. 우리 누나가 화장을 일찍 진하게 하는 바람에 피부상태가 영 말이 아니거든. 그거 보면 정말 안타까워. 여자는 찰랑이는 긴 생머리와 하얀 피부면 어디가든 반은 먹고 들어가니까 꼭 지금처럼 어린 피부 유지해야 돼? 알았지? 그럼 난 다른 데로 여론 수렴하러 간다.”


과대가 떠나고 숙희와 나는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 앉아있다 술자리가 파하자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반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건 단연 숙희였다. 엄밀하게는 숙희의 재발견이랄까? 와이셔츠 단추인 숙희에게 예쁘다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데에서 오는 일탈적인 이론에 나의 미적 취향이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예쁘다는 수식어는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하고 입술이 앵두 같은 얼굴에 화려하게 꾸며서 듣는 말이 아니란 말인가?
잠깐, 내 피부도 하얀데 숙희만큼은 아닌가? 아, 숙희는 우유나 깐 달걀처럼 뽀얗고 모공도 잡티도 없고 나는 창백하게 하야면서 주근깨가 흩뿌려진 볼을 갖고 있어서 다른 거구나. 여자는 피부가 맑고 고우면 어디가도 빠지지 않는 거구나.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왔다. 살을 아무리 빼도 피부가 매력적으로 환하지 않으면 자신감을 가져선 안 되는 법이라고 일침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때는 예뻐지는 모든 것에서 나는 제외라고 여겨져서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고작 어린 남학생 말 한마디에 휘둘리는 나를 통제할 수 없는 나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강의실에는 안경을 벗은 숙희가 나타났다. 이어서 다음날은 귀를 뚫어 침귀걸이를 한 숙희가 나타났고 또 하루 지나자 매직펌으로 생머리를 만들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허벅지와 힙이 타이트하게 맞아 숨쉬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숙희가 나타나 나를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