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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카리 Nov 24. 2023

꼭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할까?

챗GPT 너 글 진짜 잘 쓴다.

 수능을 일주일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하고 있었다. 드디어 브런치에 올릴 글 발행 버튼을 누르는 데 성공하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자꾸 신경이 쓰인다. 참지 못하고 어플에 접속을 해보니, 종 모양 알림 오른쪽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작은 민트색 점. 벌써 누군가가 라이킷을 눌렀나보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학생들에게 혹시라도 들킬까 봐 마음을 가다듬고 확인해 보니, 남편이었다. 고맙지만 격려용(?) 라이킷이라는 생각에 살짝 실망. ‘뭐야, 내가 글을 올린 건 어찌 알고? 이 남자 스토커인가?’

 “수업이 없나 봐?”

 “지금 자습 감독 중~”

 종이치고 교무실로 내려오니 공간과 영 안 어울리는 물체 하나가 책상 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생일이라고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혹시 우리 반 학생들인가? 어찌 알고 보냈을까? 어지간히도 학생들 사랑을 받고 싶은가 보다. 범인은 조금 전까지 카톡을 하던 남편이었다. 카드 내용이 짧지만, 꽤 감동적이다. 이런 남편이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감동을 곱씹고 있기에는 내 자리는 학교에서 가장 큰 교무실, 즉 교감선생님이 계시는 제1교무실이다. 핵심부서인 교무부, 연구부가 있는 제일 시끄럽고도 조용한 교무실. 아침부터 브런치에 글 올릴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어 오늘이 내 생일인 것도 까먹고 있었던 나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꽃을 받은 건 기분이 좋았지만, 그러기에는 주변 선생님들의 반응들이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이럴 수가. 야박한 사람들. 내가 자리에 없을 때 꽃다발이 왔으니 이 교무실에 앉아있는 누군가는 배송오신 분께 내 책상 위치를 알려줬을 텐데. 이런 고요함 속에서 꽃을 받았다며 동네방네 자랑할 수도 없고 일단 만만한 남편에게 연락했다. '아이고 안 하던 서프라이즈를 왜 해가지고. 보내줄 거면 그냥 집으로 보내던가 하지. 여기서 이러면 너무 민망하잖아.'라고 할 수는 없기에 좀 순화시켜서 이게 뭐냐고 나 자전거로 출근했는데 이거 어떻게 집에 들고 가냐고 하니, 남편은 부끄러워하며 마냥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스스로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이번 꽃이 마지막이 되면 안 되기에 얼른 고맙다고 했다. 당연히 고맙고 결혼한 지가 15년도 넘었는데 생일이라고 꽃을 받다니, 오랜만에 받은 꽃다발에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지만, 매우 뻘쭘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천사가 한 명 찾아와 “샘~ 이 꽃 뭐예요? 오늘 생일이세요? 너무 예뻐요~” 등등 반응을 해주고 갔다. 예쁜 천사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 이 꽃을 어디다 둬야 되나. 책상 위에 그대로 두는 건 '오늘 생일'이라고 광고하는 것 같아서 책상 옆 서랍장 앞에 내려두었다.  


 꽃다발을 사이에 두고 옆자리에 앉아계신 짝꿍샘은 상황상 꽃다발의 존재를 백 퍼센트 알고 있을 텐데 절대로 아는 척을 안 했다. 아예 옆을 쳐다보지 않는다. 질투하는 건가? 나보다 한참 어리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정교사고 능력도 있고 학생들에게도 인기 많은 잘 나가는 샘이다. 나보다 부족한 게 뭐가 있는가? 심지어 연하남하고만 사귄다는 소문이 있는 그녀다. 그러고 있는데 나와 입사 동기이자 미혼이고 10살 많으신 선생님이 와서 아까 그 꽃 뭐냐고, 오늘 무슨 날이냐고 물어보시면서 너무 부럽다고 한참을 내 자리에서 수다를 떨다 가셨다. 안 그래도 꽃다발을 받았는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들이 없어서 민망해하던 참에 아는 척을 해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하다며 내 마음을 꾹꾹 담아 전달했다. 좋은 분이지만, 평상시에 말씀이 좀 길고 자기 말만 하시는 경향이 있으셔서 사실 좀 힘들다고 느낄 때도 있었는데, 오늘만큼은 그 긴 말씀들이 나에게 참 위안을 줬다. 앞으로 이 학교에서 함께 일하는 동안에 반드시 맹세코 잘해드리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전거 바구니에 꽃다발을 싣고 집으로 출발한다. 이제 이런 거 안 해줘도 충분히 마음 알고 있으니 앞으로 이런 걸로 돈 쓰지 말라고 남편에게 말할 참이었지만, 자꾸 시야에 들어오는 꽃다발이 오늘이 생일임을 상기시켜 줘서 하루종일 왠지 기분이 좋았다는 사실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꽃과 함께 찾아온 서프라이즈 민망함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순간 원망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마음과 사랑을 전해 준 남편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다시 커졌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모르는 주민분이 꽃이 너무 예쁘다고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꽃에게는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힘이 있다. 내가 예쁘다고 칭찬받은 것 마냥 뿌듯해서, 하마터면 '저 오늘 생일이거든요~' 할 뻔했다. 아차차.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 참았다. 오늘을 기념하고 기억할 테야. 나 생일에 꽃 선물 받는 여자라고. 학교에서 마음껏 못 찍었던 사진을 집에 와서 여러 장 찍었다.   

     

 이 날 결심했다. 앞으로 누군가가 서프라이즈로 꽃다발을 받는다면, 찾아가서 오버해서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의 말을 건넬 것을. 원래부터도 (속으로는 질투가 날지라도) 좀 과장을 보태서 호들갑을 떠는 그런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정교사고 뭐고 어리고 뭐고 누가 봐도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한 옆자리 짝꿍한테 축하한다는 말은 못 할지언정 오늘 무슨 날이냐고 정도는 물어봐줄 수 있는 사람이 AI와 대체되지 않는 미래에 필요한 인재가 아니더냐. 타인에 공감하며 함께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될 것이다.

  



 며칠 후 숙제 때문에 챗gpt를 활용하려던 아들의 모습이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다. 모니터를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이내 조용히 나를 노트북 앞으로 부른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야 되나 하다가도 우리 둘이 킥킥거리고 웃고 있으니 남편이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불안해하면서 뭐냐고 물어본다. 챗 gpt라고.. 말하니 앗 설마? 하며 노트북 쪽으로 달려와 다급히 삭제버튼을 누른다. AI 이놈 편지도 정말 잘 쓰는구나!! 나 네가 써준 편지 보고 감동 먹었잖아.  

'아내 생일 카드 축하 메시지'에 대한 답변 :)

아마 이 글도 제일 먼저 와서 라이킷을 누를 남편님.

이제 알림을 꺼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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