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몰랐던 사랑과 기쁨을 알게 해 준 첫사랑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일컬어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부른다.
흔히 행복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이 말은
‘행하는 것 자체로 보상을 받는 행위’를 뜻한다.
헤도니즘(쾌락주의)에서 사용하는 ‘헤도니아’라는 말과는 반대의 뜻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일은 돈벌이 수단이다.
반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성장과 지역 사회에 기여하기,
의미 있는 관계 맺기 등을 목표로 일하며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보다 일에 대한 만족도도 훨씬 높다.
칼 필레머 지음 / 박여진 옮김 /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P.89)
이전에는 몰랐던 사랑과 기쁨을 알게 되어 강력했고 그 이별 또한 강력하여 영원히 잊지 못할 첫사랑인 마냥 마음속에 애증의 감정과 함께 남아있는 A학교에서의 이야기.
배움에 의지가 있는 학생들과 잘 가르치고자 애쓰려는 교사와의 만남이 이상적인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경쟁이 치열한 힘든 주요 과목이 아닌 제2외국어 수업 특성상, 교사는 시각장애인 분들을 대상으로 했던 수업 경험과 일본 현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동감 있는 수업이 될 수 있도록 하여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도를 높이고자 노력하였고, 학생들도 비교적 다른 과목 수업 시간보다는 덜 스트레스를 받으며 대체적으로 가볍고 제2외국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일본어 수업을 듣는 만큼 적극적인 태도로 수업에 임해줬다. 또한 이 학교는 국제교류가 활발한 학교였는데, 그중 일본학교와는 세 학교나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 중이었다. 이 업무를 담당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세세하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자율성이 보장이 되면서 나의 장점과 특기,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였기에 행복하고 즐거웠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이미 충분히 행복한데, 돈까지 주면 나야 땡큐지! 뭐 이런 느낌으로 매일을 꿈속에서 지내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항상 정원을 넘는 지원자들 중에서 담임선생님들의 평가와 면접 등을 통하여 선발 과정을 거쳤다. 여행사를 통해 티켓을 예매하고 학생들의 여권 등의 서류 취합을 한다. 일본에 가서 나라 소개와 학교 소개 발표를 위해 사전에 준비를 시키고 일본 학생들 앞에서 선보일 노래나 춤 등의 퍼포먼스를 준비 또한 내 담당이다. 그리고 방문 날짜가 되면 일주일 정도 10명 정도의 학생들을 인솔하여 일본 학교를 방문한다. 몇 개월 후 일본 학생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면 한국에서의 스케줄 표을 짜고, 또한 귀한 원어민 일본 학생들을 활용하여 우리 학교 일본어 수업에 참관시켜서 일본어를 선택하여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의 학습 동기부여를 시켰다. 교내에서만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 학생들을 데리고 경복궁, 전쟁기념관, DMZ 투어, 남산타워 등 한국 유적지를 견학시키기도 한다. 오랜 일본 생활로 그동안 못 다녀본 관광지를 적어도 1년에 2, 3번씩 싫증이 날 정도로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각 국에서 일주일 씩 서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이 많이 친밀해질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같은 경우는 거리도 가깝고 정서도 비슷한 까닭으로 졸업 후에도 서로 교류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한 번 만나면 일주일 내내 함께 하기에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의 진한 우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뜨거워지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각 나라의 미래의 리더가 될 학생들의 진한 우정을 보고 있으니 앞으로의 한일관계도 걱정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실감이 나서 벅찼다.
나는 학창 시절에 꿈이 없는 아이였다. 진로 희망사항을 적어낼 때면 일본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별 이유 없이 통역가, 번역가 이렇게 적어냈었다. 구체적인 진로 희망은 없었지만, 일본에서 초, 중, 고를 보내면서 태어난 나라인 한국과 살고 있는 나라인 일본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해왔던 것 같다.
학생 국제교류 담당자로서 사실 학생 케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 선생님들 케어도 필수 업무이다. 영어만으로는 수월한 의사소통이 어렵기 때문에 통역사가 되어야 했다. 회식을 하다 보면 술잔이 오고 가는데 술이 들어가면 또 별의별 이야기가 나온다. 각 선생님들의 캐릭터를 살려주고, 서로 주고받는 농담의 그 맛을 살려내며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됐을 텐데, 사실 아무도 알아줄 수 없는데, 누가 그렇게 애쓰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냥 잘 해내고 싶었다. 그리고 뭔가 내 마음에 들게 통역이 잘 되면 내심 혼자서 큰 뿌듯함을 느끼곤 했었다. 자기만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잘하면 일본 선생님들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언제나 나는 한국 대표이자 학교 대표라는 생각으로 이 업무에 임했다.
나의 30대를 바친 첫 근무지에서의 생활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행하는 것 자체로 보상받는 것)의 삶이었다. 꿈이 없던 소녀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꿈을 완벽하게 이뤘다.
꿈을 이룰 수 있게 해 준 A학교에서의 추억은 다음에 또 이야기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