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가을 n.2 정리
# 가을 (2019)
Chapter 2 # 가을 n-2 정리
가을의 절정 또한 성큼 찾아왔다. 주변의 풍경은 알록달록한 단풍을 지워버렸다. 대신, 짙은 쓸쓸함을 주는 채도 낮은 낙엽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주변 풍경의 변화와 더불어, 나 자신도 변화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성숙한다는 것은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더 이상 쓸모없는 것들을 떨쳐 없애 낙엽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추려나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 반과 반의 반년 동안 수확한 것을 솎아내고 정리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 시간이 없다면, 쓸데없는 정보로 가득 차 렉 걸린 컴퓨터처럼 인간도 과부하가 걸려 버리기 십상이니까.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졸업이 성큼 다가옴에 따라 나는 나에게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시간이 깊어졌다.
나의 주변 환경 또한 빠른 시일 안에 변화할 것이고, 나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정말 주변의 모든 것들은 하나의 NPC(non-player character.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도우미 캐릭터. 네이버 백과사전) 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쿠 누나? 아직 졸업 못한 수의대 학생? 다양한 답이 공존할 수 있겠으나, 나는 무엇과도 바꾸기 싫은 하나의 명제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쿠와 방울이를 키우면서 느낀 점은. 이들 강아지들은 모두 순수하고 정직한 삶을 산다는 점.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안다는 점. 현 순간에 대해선 매우 여유롭지만 생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굳센 심지가 있다는 점. 수동적인지 능동적인지는 모를 이러한 모토는 내가 이들과 함께 하면서 배운 교훈이며, 잃어선 안될 내 자아의 큰 부분이라는 점을 각인하게 되었다. 살다 보면 인간이란, 파렴치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짓이든 꾸밀 수도 있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스스로가 진짜 나 자신일 수 있는 영역을 구축하는데 조심스러워지고, 사회 속의 나라는 존재는 때때로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런 선하디 선한 친구들과 함께이다 보면 마음의 의지가 되고 상처 또한 저절로 치유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크고 작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나, 쉽게 연약하기도 하다. 나 또한 사적인 생활에서는 쉽게 정을 주고, 이를 다룸에 있어 미숙한 점이 많은 연약한 개인일 때가 많다. 그러나 하쿠나 방울이나 충실하고도 선한 동물 친구들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를 항상 첫 번째로 각인하고, 자신의 삶을 너그러이 공유한다. 기꺼이 서로 사랑하며 공생하는 것만이 전부인 것 같이 느껴지는데, 나를 조건 없이, 한없이 믿고 따르는 존재가 이 세상에 공존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또한 나도 생활하면서 이러한 개념을 인지하고 학습하게 된다. 순수하고 선한 존재를 귀히 여기는 것들에 대한 애정 또한 따라 늘어가게 된다. 따라서 사회로 나아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내 친애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요소들이 풍부하다. 이에 항상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아마 반려동물이 없는 인간만이 존재하는 사회였다면, 세상은 순수와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중요한 교과서가 없는 것과도 같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보다 더 삭막하고 퍽퍽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 엄마가 매일 하는 말처럼 큰 행복을 잃은 사회이거나.
가을의 끝에서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하쿠는 항문 없이 태어난 개로, 생의 거의 직후에 항문(말 그대로 문! 입구. 구멍)을 만들어 기존의 장과 이어 붙이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온전히 성숙하지 못한 장과 배변 근육의 부족으로 배변 실금과 만성 설사를 달고 대학병원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하쿠의 주변은 온통 똥밭이었다. 하지만 특유의 순수한 호기심과 밝은 성격 탓에 지나가던 한 수의대 학생을 멈춰 서게 했다. 하쿠와 주인은 하루 2-3회 운동치료(쉽게 말해 산책)를 통해, 또한 적절한 식이 공급을 통해 배변 실금과 설사 증세를 약 1년 반여 만에 상당 부분 해결했다. 따라서 하쿠는 정말 근소한, 간헐적인 실금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실내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하쿠용 실금 팬티를 제작하여 컨디션 난조에 따른 약간의 실금 또한 제어 가능하게 되었고, 하쿠는 실내생활로 입성. 최근까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하쿠의 주인은 하쿠와 함께 심리적 안정과 반려견의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배웠으며, 부족하나마, 늦게나마 수의사로서의 자세와 노력을 재고함과 동시에 실력 있는 수의사의 길을 정진하려 노력 중이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하쿠는 아니고 우리가 산책길에 만난 고양이 친구의 뒷모습. 이 친구도 생각에 깊이 잠긴 듯하다.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쿠와 나의 가족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잡다한 마음이나 상황들은 떨쳐 버리고, 내 실력을 갈고닦아 보다 나은 세상을 준비하고 가꾸어 나가는 것. 또한 하쿠를 보다 잘 길러서 행복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보호자로서의 역할에도 최선을 다할 것. 그리고 하쿠를 더욱 사랑해 줄 것. 또 한 번의 강력한 쇄신을 시도하고 싶다고 생각 드는 계절이다.
Chapter 2 #가을 – 에필로그: 낙엽과 쇄신과 행복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특별한 어떤 것을 이루는 것.
누구나 마음 한편에는 이런 인생 목표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지면 한없이 설레고,
모순덩어리같이 느껴지면 끝없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문득 어느 순간 이런 것들도 대단한 무엇이지만,
행복은 이들과는 또 다른 무엇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 아빠가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오면 냉큼 수레에 올라타서는 내려오지 않는 하쿠처럼.
(산책을 오래 한 탓일까 그 순진한 뻔뻔함이 참 웃겼다.)
하쿠 덕분에 요즘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