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1.언젠간 있을 끝.
과거에서부터 훗날 어느 미래에.
사실 현재 하쿠가 잘 지내오고 있기 때문에 이 글들의 끝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숙고한 끝에, 반려견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끝(나 또한 겪은 그 끝)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n.1 언젠가 있을 끝. 그리고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mdrome)
나는 고집 센 아이였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리고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원하는 것을 얻고자 애를 쓰곤 했다. 그러한 성향은 지금까지 커오면서 나에게 여럿 좋은 결과물들을 얻게 해 주었다. 하지만 역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는 습하고 더운 장마철의 공기처럼 찜찜하게 가시지 않는 불쾌한 기분에 휩싸여서 몇 날 며칠을 끙끙거렸다. 어딘가 패배한 듯한 씁쓸한 기운에 때때로 깊이 예민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집착하게 되곤 했다.
나는 다소 개 같은 사람이다. 욕이 아니고 정말 강아지처럼 처음에는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갖고 다가가지만, 조금이라도 그 대상이 진실되다 싶거나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면 쉽게 정을 주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인연이 그렇게 행복하게,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쉽게 착각하는 편이기도 하다.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다분히 잘 알면서도 이별이 힘들어서 끝내지 못하고 골머리를 앓는 경우도 많았다. 당장 죽는 것도 아니지만, 마주한 인연을 떠나보내는 것은 꽤나 나에게는 큰 결단이 필요한 힘든 일이었다. 앞뒤를 생각하지 않아 헤어짐이 항상 힘든 사람.
하지만 세상에는 아무리 때를 써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영원한 삶’ 말이다. 이때, ‘삶’이라는 끈을 단절시키는 모멘트인 ‘죽음’은 ‘끝’과 동의어다. 다시는 그 존재를 보지 못할 것이며, 듣지 못할 것이며,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것. 다시는 서로 소통할 수 없이 추억 속에서만 그리워하며 마음 아파하게 될 뿐, 시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이제는 ‘끝’이 난 것이다. 슬프게도 자연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어떠한 노력으로도 이러한 죽음을 거부하거나 막을 수 없다. 아무리 어떠한 존재에 ‘딱 조금만 더 , 이번만 제발’ 하고 조르고 매달려보아도, 또는 스스로 골방에 박혀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보아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참으로도 매정하고 무자비하다고 느껴져도 어쩔 수 없다.
내 평생 사랑할 방울이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하얗고 작고 소중한 몰티즈 방울이 말이다. 착하고, 나의 말을 잘 알아들었고, 언제 어디서나 나의 품에 쏙 안기던 사랑스러운 강아지. 울면 와서 눈물을 핥아주고, 철없는 마음에 훈련한답시고 화를 내고 벌을 주어도 이내 뛰어들어 꼬리 흔들며 어린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던 방울이. 때 묻지 않은 그 순수한 영혼은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정직하고 행복한’ 내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혼자 먼 여행을 떠났다. 그러기까지 14년 반 동안 우리는 동행하였다.
어린 시절 나는 방에 틀어박혀 책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주로 고전소설이 그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쓸데없이 감정이 풍부했던 것 같다. ‘슬픈 이야기나 어두운 현실의 무게와 짐들’에 대한 글을 읽을 때면 감정이입을 지나치게 하여 덩달아 힘든 하루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나는 기필코 감정 없는 로봇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 계기란 우연히 ‘말리와 나’라는 책 한 권을 읽은 것이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 '말리'와 '말리의 평생’을 함께한 삶에 대한 회고록 같은 책이었는데, 책의 첫 부분부터 ‘완전 방울이랑 나의 이야기잖아?’ 하고 재미있어서 한 부분 한 부분 공감하며 읽었다. 하지만 끝부분에서 말리의 죽음과 그 여정 또한 꼼꼼하고 자세하게 기술돼 있었다. 어린 나는 사랑하는 방울이도 미래에는 이렇게 홀연히 내 곁을 떠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혼자 방에서 닭 똥 같은 눈물로 시작해 끝에는 대성통곡을 하며 책을 덮었다.
마감이 약간 벌어져 코팅판이 덜렁덜렁 흔들리던 책장의 맨 아래층 깊숙이 책을 숨겨놓고 다시는 그 책을 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어린 나이에는 그 슬픔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 당시 내가 택한 결론은 ‘외면’이었다. 멍청하게도 언젠가는 방울이와 나도 죽음을 마주하게 될 것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미래를 준비하지도 못한 채로 ‘우리 방울이는 오래 살 거야’ 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접어 버렸다. 또한 다시는 이렇게 감정의 다이빙(그 당시 내가 느끼기로는 맨땅에 헤딩)을 하지 않기 위해 감정이입 또한 선택적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슬퍼도 내가 슬프고 싶을 때, 기뻐도 내가 기쁘고 싶을 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선택적으로 감정을 느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만큼 그 당시 어린 내가 느꼈던 슬픔은 혼자서 감수해 낼 수 없는 정도였다. 충격이 꽤나 컸던 탓인지 실제로 그 이후로는 눈물이 날만한 일이 있다가도 뚝 그칠 수 있게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다. 아마 사소한 일들과는 비할 바 없이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쓸쓸하고 심각한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 버린 것일까. 그 후로 나의 기도는 막연히 26살(그 당시 내가 알던 최장수견의 수명)까지 방울이를 살리는 것이었다. 바보 같이 막연히. 그저 막연히.
어린 날의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