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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솔 May 29. 2024

형은 실물이 더 낫네요

감정 사기를 당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다

형은 사진보다 실물이 낫네요.


X가 나를 보고 했던 첫마디다. 그 한마디에 넘어갔고 그 한마디에 희망을 걸었다. 드디어 나한테 잘해주고 나를 알아봐 줄 사람이 나타난 걸까 기대했다. 그때 정신 차려야 했는데 말이다...



전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지내던 때에 우연하게 백혈병을 앓고 있는 인플루언서(리플리 증후군 환자였다)를 알게 되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지만, 개인 SNS 피드는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때 그 친구의 계정에서 어떤 잘 생긴 남자랑 함께 찍은 셀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밝은 피부 톤에 착한 눈웃음, 어렴풋이 보이는 보조개가 친근감을 더 했다.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 걸까?


잘 생겼다.


그 사진을 여러 번 보면서 이 남자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한국인일까? 취미는 무엇일까? 혹시 나랑 같은 게이일까? 동성애자라고 무턱대고 동성한테 고백할 수 없다. 이성애자가 더 많은 세상이다. 게다가 동성의 고백을 받고 기분 나빠하거나 심지어 주먹까지 날릴지도 모른다. (X의 관상이 그런 험악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큰 기대 없이 일상을 보냈는데, 인연이란 결국 이어지는 걸까? 백혈병 환자라고 거짓말했던 사람에 대해 폭로글을 쓴 날, X가 SNS를 통해 나를 팔로우하고 첫인사를 나눴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혹시 방금 업로드한 글을 제 인스타스토리에 한번 공유해도 될까요? 저도 이 사건의 피해자이고 작가님과 같은 복잡한 마음입니다…


중국에서 온 유학생인 걸 알고 있었지만, 첫인사말로 보낸 문자는 한국인이나 다름없었다. #표현력이 뛰어난 유학생. X에 대한 키워드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사기꾼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 참고:

내 인생은 몇 퍼센트의 거짓이 섞여 있을까? (brunch.co.kr)


X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그의 SNS를 볼 때면 감성적이고 온화한 분위기의 이미지에 끌려 한참을 머물게 된다. 그의 느낌 있는 이미지를 빌려 글을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모임, #중국인유학생, #천칭자리, #동네친구 여러 공통 키워드를 가진 우리는 각자의 일상과 고민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알게 된 지 일주일 만에 우리는 첫 만남을 가졌다(사기꾼한테 몇 달간 감정사기를 당한 뒤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조심스러웠지만, X라는 사람은 괜찮을 거 같았다.)


월요일에 마침 퇴근길에 한번 만나봐도 좋을 거란 생각에 약속을 잡았다. 먼저 퇴근한 나는 카페에서 X가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오기를 기다렸다. 앞으로 30분이면 그를 만난다. 어떤 얘기를 해야 하지? 나를 보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온라인으로 알 게 된 사람을 오프라인으로 만날 때면 항상 생각이 많아진다. 그렇다고 오프라인에서 관심 있는 상대에게 선호감을 표현하며 말을 걸 용기 또한 부족하다. (해서 가끔 길을 걷거나 머문 장소에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데이팅 앱을 켜고 근처 사용자들의 프사를 둘러본다.)


지하철 입구 밖으로 나오는 X의 걸음걸이는 씩씩했다. 역시 어려서 그런가? (나보다 7살이나 어리다.) 얇은 후드티를 입고 있어 감기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형은 어떻게 사진을 더 못생기게 찍어요?
실물이 사진보다 낫네요.

심쿵, 이 자식 선수인가? 첫 만남에 이런 멘트를 날리면 나더러 어떡하란 말인가? 진심인지 작업 멘트인지 의심의 눈초리를 놓지 않기로 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허겁지겁 삼켰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X가 나를 보고 했던 그 첫마디만 맴돌았다.


식사를 끝내고 그를 바래다주기로 했다. X의 자취방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우린 꽤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는데 왜 데이팅 앱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까.) 건물까지 바래다주고 헤어질 생각이었으나 맥주 한 캔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래, 여기까지 온 이상, 자취방이나 구경해 보고 갈까? (방을 보면 한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고 하잖아 ㅎㅎ)


혼자 살기에는 적당한 원룸이었고 예상보다 꽤 깔끔했다. 맥주를 마시며 지방대를 졸업하고 서울의 대학원으로 오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은 급하게 환승하려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발목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렸다고 한다. 그때 남은 흉터가 아직도 선명하다. (왠지 모를 측은지심이 발동해 버렸다.)


맥주 한 캔을 들이켜고 나니 술기운이 살짝 올랐고 난 가까이 다가가 먼저 키스했다. X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줬다. 첫 만남에 키스하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래도 애널 섹스까지는 오버인 거 같아 그전 단계까지만 즐겼다. (나를 집까지 초대한 X나 기꺼이 방 구경하겠다고 들어온 나나, 우리는 이미 스킨십을 기대하고 있었다.)


자취방에서 거의 1시간 가까이 머물고 X는 나를 건물 아래까지 배웅해 주었다. 11월이라 날씨는 쌀쌀했지만, 우린 횡단보도 앞에서 꼭 그러안으며 포옹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동동 떠있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꽤 괜찮은 남자친구를 만들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X가 이모티콘을 보냈다. 원나잇만 즐기려는 목적이 아닌 거 같아 다행이었다. 침대에 누워 나랑 사귈 생각 없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첫 만남에 연인관계를 확정 짓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거 같아. 둘이 서로 마음이 있는 건 변함없잖아. 연애하면 나도 형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 2시간 만나고 연애하자 이런 쉬운 결정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뜨끔했다. 연애 경험이 많다고 괜히 꼰대발언을 한 게 아닌가. 성급히 관계를 결정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너무 좋아서 놓칠까 봐 두려웠을까? 일단 “연인”이란 타이틀이 필요했을까?


나보다 7살이나 어린 친구의 일침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자만추(자고 나서 만남 추구)'도 무조건 한 방에 결론 나지 않는 일이었다. 조금 느리더라도 천천히 알아가는 것 또한 나름 괜찮은 시작이었다.




에필로그:

게이는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데이팅앱을 애용한다.


Jack'd, Heesay(Blued)를 써 본 적이 있으며 요즘에는 Tinder에서도 성향을 밝히는 사람이 꽤 많아지고 있다.


App Store에서 제공하는 Jack’d - 게이 채팅 & 데이팅 (apple.com)


App Store에서 제공하는 HeeSay: Blued 남성 커뮤니티, 라이브&소셜 (apple.com)


App Store에서 제공하는 Tinder 틴더 (ap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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