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이나 어린 남자를 만난 다는 것
사랑아 왜 도망가/ 수줍은 아이처럼 / 행여 놓아버릴까 봐
꼭 움켜쥐지만 / 그리움이 쫓아 사랑은 늘 도망가/ 잠시 쉬어 가면 좋을 텐데
사랑은 늘 도망가 - 임영웅, 노래 가사
가족 모임 때 가끔 외식을 마치고 노래방에 갔었다. 그때 알 게 되었다. 매형이 음치라는 걸. 그래도 누나랑 결혼하고 슬하 아들 둘을 낳고 키우는 거 보면, 노래를 못해도 결혼 상대로 괜찮구나 싶었다.
해서 연애 상대를 꼽을 때 굳이 노래를 잘 부르는 상대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어차피 노래방에 자주 갈 것도 아니고 노래를 아무리 잘 불러봐야 가수만큼 부를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X는 달랐다. 그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 중에서 제일 잘 부른다, 놀랄 정도로 말이다…
저녁 9시면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8시 30분에 출발했다. X는 친구랑 저녁을 먹고 오느라 조금 늦을 거라 했고 난 이따가 출발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하려고 미리 출발했다. 9시가 넘자 지금 귀가 중이라고 톡을 받았다. 미리 도착한 나는 X의 자취 건물 출입문 앞에서 기다렸다.
X의 친구가 밀크티 포장 중이라 했다. 게다가 같은 건물 위층에 사는 여성 회사 동료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부랴부랴 건물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X가 아직 지인들한테 커밍아웃하지 않은 이유로 나까지 조심해야 했다. 건물 뒤편의 골목길을 거닐면서 이따가 할 말을 정리했다.
우리 오늘부터 1일 할까?
5분이 흐르고 10분이 흘렀다. 현관에 들어섰는데 여성 동료가 X의 매트리스가 어떤 건 지 구경하고 싶다며 자취방까지 들렀다고 한다. 난 다시 골목길을 왔다 갔다 반복했다. 그리고 9:30이 되어서야 그의 자취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X는 내가 시간 맞춰 방금 도착한 걸로 알고 있다.)
자취방에 도착해 침대에 털썩 앉았다. 1분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미리 왔지만, 선약이 있어 늦은 X를 뭐라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다만, 이 감정에 대한 각자의 온도 차이가 있는 게 아닌지 살짝 의심이 들었다.
나만 죽도록 X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났던 걸까? 9시까지 만나자고 미리 콕 집어서 얘기를 했어야 했나? 선약이 있으니 다음에 만나는 게 나았을까? 처음부터 그냥 섹스 파트너로 만날 생각이었던 걸까? 난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여 기분이 다운된 상태였다.
X는 눈치 없이 아무 말없는 나한테 무턱대고 입술을 내밀었다. 이틀 만에 만나 흥분한 그와 달리 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내가 심란하든 말든 X는 본인의 욕구를 채우는데 급급했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침대에 누워 현자타임에 빠진 X가 “오늘 하루 어땠어?”라는 말이라도 해 주길 기대하며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누워있던 그는 나의 시선을 피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를 만나는 이유가 역시 욕구를 위했던 걸까.)
순간 타오르는 불씨는
이내 꺼지기 마련인 걸까.
이튿날 어정쩡하게 아침 인사겸 문자를 보냈다.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고. 너의 잠자리 취향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넌 성욕을 원해서 나를 만나지만, 난 풋풋한 연애를 원해서 만난 거라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전하고 난 홀로 전시회를 보러 다녀왔다. 기분을 풀기 위해 자주 찾는 곳이 공연장이나 전시회다. 굳이 둘 이상 필요한 활동이 아니며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이대로 다시 일상을 즐기며 주말을 보냈다.
그 뒤로 닷새가 지나고 다시 약속을 잡은 사람은 나였다. 주말에는 혼자 코인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고 헬스장에서 운동했다. 다시 데이팅 앱을 깔고 근처에 뜬 훈남의 프사를 감상하거나 이따금 나한테 보낸 흔남의 문자에 답장했다.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지만, 마음속에는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오랜만에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비주얼이 내 스타일이다.
음식 취향이 비슷하고 여행이나 사진 촬영하는 걸 좋아한다.
마음씨가 착하고 열정적이다.
본인만의 프라이드가 있고 주장이 뚜렷하다.
(성적 패티쉬만 빼면 사실 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거 같았다.)
닷새 만에 만난 그는 첫 만남 때 빛이 나던 청년이 아니었다. 조금 핼쑥해지고 자신감을 잃은 어린양처럼 보였다. 내가 그리워했던 만큼 나를 떠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미안했다. 이기적인 나 때문에 마음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얼음물을 확 뿌렸으니까.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 아쉬워 노래방에 들렀다. 먼저 선곡한 나는 마이크를 들고 꽤나 진중하게 노래를 불렀다. 가수 뺨치는 수준은 아니어도 노래방에서 즐길 수 있는 실력이었다. 역시나 점수 또한 나쁘지 않게 90점 대로 나왔다.
다음으로 X가 선곡한 노래 반주가 흘러나왔다. 임영웅의 <사랑은 늘 도망가>였다. 예전에 엄마가 주말마다 즐겨 보던 드라마 OST다. 이렇게 감미롭고 듣기 좋은 곡인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게다가 노래 가사는 왜 또 이렇게 애처롭고 우리 둘의 상황과 딱 맞는 건지.
음색, 감정, 발음, 음정까지 완벽했다. 소파에 기대고 느긋하게 노래를 부르는 X가 멋있어 보였다. 그때 반해버렸다. 이 남자 내 거로 만들고 싶었다.
노래를 번갈아 부르던 우리는 나란히 앉아 같은 곡을 불렀다. 분위기에 취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그의 온기가 느껴졌고 나한테 쌓인 분노가 전달되었다. 원망이 섞인 떨린 손을 놓지 않으려고 꼭 잡았다. 우리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 걸까?
노래방은 지하에 있었다. 계단을 타고 먼저 올라간 그가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첫눈이었다. 온 세상은 고요했지만, 귓가에는 날리는 첫눈과 함께 은은한 사운드가 들렸다. 꼭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소름이 돋아 그해의 첫눈 영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첫눈이 오는 날 첫날로 정했다. 오늘부터 1일이다. 고마워, X야. 이기적인 나를 용서해 주고 남자친구가 되어 줘서.
에필로그: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귄 적이 있지만, 그들이 내게 남긴 추억은 어떤 장면보다 노래였다. X가 불러준 “사랑은 늘 도망가”처럼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들.
애인 있어요 – 이은미
응급실 – izi
모든 날 모든 순간 – 폴킴
사랑은 늘 도망가 – 임영웅
类似爱情 – 萧亚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