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정말 괜찮은 걸까?
인간은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기 위해 백신을 맞는다. 백신을 접종하면 몸의 면역 체계를 활성화시켜서 나중에 병원체가 침범할 경우 빠르게 대처하도록 하는 역할로 작용한다. (출처: 백신 (naver.com))
막장 드라마나 로맨스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을 당하고 힘든 과정을 겪고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모습을 보면서 미리 연애 백신을 접종하는 개념으로 콘텐츠를 즐겼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나도 모르게 조심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올인한다.
그러다 촉이라는 게 발동해서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의 외도를 발견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제발 이번 연애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X의 인X그램 팔로워는 1000명이나 되고 여행 크리에이터로 활동할 때 운영했던 중국의 SNS 계정은 구독자가 10만 명이나 되다 보니 일상은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 위주로 이뤄진다.
지나치게 행복하면 반드시 불행해진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행복도 불행과 같이 동행하는 섭리가 있는 걸까. X랑 드디어 안정기에 들어섰나 싶을 때, 나를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X는 화장품 브랜드를 홍보하는 에이전트 회사에 다녔었다. 브랜드 홍보 겸 인플루언서, 연예인의 SNS 계정 운영도 담당하다 보니 엔터 쪽의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틱톡 계정 100만 팔로워의 메이크업 크리에이터랑 협업하게 되었는데 X를 콕 집어서 촬영을 담당해 줄 수 있냐는 거다.
회사에서 시켰으니 X도 어쩔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귀찮아하면서도 이참에 인플루언서를 가까이에서 마주하며 경험담을 듣고 노하우를 배울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모양이다. 그는 신이 났지만, 난 신경 쓰였다.
왜 하필 X를 콕 집어서 불렀을까? 그 회사에 촬영할 수 있는 사람이 X만 있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메이크업 인플루언서는 딱 봐도 이쪽인 거 같았다. 아무래도 X한테 사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확신이 들 정도다.
촬영 당일은 정말 밥 먹을 시간 없이 바빴다고 한다. 오전 일찍 출발해서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를 소개하는 영상부터 시작해 소속 아티스트 소개하고 인터뷰 영상까지 촬영하다 보니 정신없었을 거다. 게다가 틈틈이 메이크업 수정하는 인플루언서와 곁에서 촬영 겸 통역을 담당한 X는 온종일 바빠서 문자를 보낼 시간도 없었다 한다.
둘이서 정말 비즈니스 파트너로 업무에 열중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촬영 당일 저녁은 인플루언서가 선약이 있어 같이 회식할 시간이 없었는데, 나중에 X를 따로 불러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것도 압구정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단둘이 스테이크를 썰었다.
낯선 남자랑 둘이 저녁을 먹어도 되냐고 나한테 의견을 물었지만, 어차피 비즈니스 관계니까 만나라고 했다. (사실은 엄청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연애한다고 지나친 간섭은 하기 싫었다. 더군다나 X를 믿었다.)
레스토랑 내부 사진이며 스테이크, 음식 사진을 찍어서 실시간으로 보내줬다. 그 와중에 와인도 보였다. (그래, 스테이크는 와인이랑 마셔야지. 저거 한 병 마신다고 별 일 있겠어?) 두 사람의 오붓한 저녁 시간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대화를 많이 하라고 문자를 보냈다.
20:30 이후로 1시간 남짓하게 답장이 없었다. 둘이서 저녁 먹으며 정말 많은 얘기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어도 아무런 문자가 없어 생각이 많아졌다.
저녁은 잘 먹고 있나?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서로 커밍아웃했을까? 혹시나 술을 마시고 뻗었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렇다고 전화할 정도는 아닌 거 같아 일단 기다렸다. 내 남자친구를 믿어보기로 했다.
22:20이 넘어 X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끝나서 돌아가는 길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알겠으니 이따 보자 하고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엄청 궁금했지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온다던 그는 오는 내내 아무런 문자도 없었다.
인플루언서랑 식사하면서 마무리하지 못한 얘기를 주고받느라 내 문자는 답장 안 하는 건지? 지하철 타고 오는 길에 뭐 하고 있는지?
비가 오는데 우산 없이 이따가 카페 올 수 있냐고 묻는 말에 우산이 있다는 문자를 받았다. (퇴근하면서 회사에서 챙겨 나온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잠시 뒤 카페에 도착한 그는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비닐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 남자가 사줬다고 한다. (왜? 굳이? 우산 정도는 자기 돈 주고 살 수 있잖아?)
그게 다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나서 인생 네 컷을 찍었다. (나랑 사귄 지 3개월이나 되었지만, 우린 아직 인생 네 컷을 찍지 못했다. 아니, X가 찍는 걸 싫어했다.)
둘이서 분위기 있는 곳에서 저녁을 먹고 와인을 홀짝이다 거리에서 인생 네 컷을 찍고 비가 오니 우산까지 사 주는 남자를 만나고 온 남자친구.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X는 나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시종일관 웃는 표정으로 내가 질투하는 거라며 귀엽다고 놀린다. 정말 아무 일 없었으니 과대망상하지 말라는 얘기만 반복했다.
X의 대수롭지 않은 태도와 반응에 더 화가 치밀었다. 같은 우산을 쓴 채로 산책하며 그의 자취방 건물 아래에 당도했다. 걷는 내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인플루언서가 어떻게 첫 시작을 했는지 썰을 풀었지만, 난 그게 궁금하지 않았다.
형은 저녁 어떻게 보냈어?
나 오래 기다렸지?
나 보고 싶었어?
듣고 싶은 얘기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고 X는 자신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 말을 듣었는지, 스테이크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떠들기만 했다.
할 말은 다 한 거 같고 내 기분은 X랑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은 상황이 아니라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한 뒤, 그 남자가 선물한 우산을 넘겨받고 집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빗방울이 작아져 괜히 아무 죄 없는 우산이 괘씸해서 길가 쓰레기 더미에 버렸다. 내가 굳이 그 우산을 집까지 가져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비는 멎었으나 눈가는 촉촉했다. 그냥 나도 모르게 터져버렸다. X한테 있어 좋은 기회고 나를 헤아려서 얼른 달려온 것도 알겠지만, 눈물만 자꾸 흘렀다.
오늘 상황이 문제인지, 나의 연애경험이 문제인지. 그냥 우울하고 슬퍼서 눈물이 났다. 어찌 보면 과대망상일 수 있지만, 서운하고 답답하고 억울한 나의 심정을 X는 알고 있을까? 언젠가 이해하고 배려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까? 이 남자 정말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날 밤은 쉽사리 잠에 들 지 못했다.
에필로그:
게이에게는 같은 동족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일종의 레이더 같은 기능이다.
길을 걷다가 잘 생긴 남자를 발견할 때면 레이더가 작동하는데 아이컨택할 경우 그 사람도 이쪽일 가능성이 올라간다. 게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기에 누군가 자기를 보는 것에 빠르게 반응한다. (만약 그 잘생긴 사람이 본인이라면 아이컨택을 하지 않는다. 대신 같은 동류가 본인을 흘겨 보는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못본 체 한다.)
어느 정도 커밍아웃한 게이라면 스타일에서도 티가 난다. 눈에 띄는 밝은 색이나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편이고 심지어 레이보우 관련 아이템을 착용한다. (난 자랑스러운 LGBTQ+ 인이니까.)
반면에 주변 지인들한테도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라면 최대한 평범한 스타일링에 말수가 적을 가능성이 크다. 혹시라도 들킬까봐 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연애 상대가 이런 케이스라면 둘이 같이 있을 때 트러블이 많이 생기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