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화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것
X랑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의 오전은 우울했다. 아무래도 어젯밤의 기분이 그대로 이어진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 홧김에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 혼자 묵묵히 외출 준비하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개인 SNS 스토리에 ‘심란하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더니 X가 이내 DM을 보내왔다.
형, 무슨 일이야? 왜 심란해?
10시부터 피티 수업이라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고 답장했다. 나만의 시간에 집중하며 운동했다. 심란하거나 마음이 지쳐 있을 때는 운동을 하거나 액티비티를 즐기면 안정을 찾는 편이다. (실제로 운동하면 혈액순환이 잘 되고 엔도르핀, 도파민, 세로토닌, 글루타메이트 등 신경 전달 물질 생성이 촉진되어 운동이 우울증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라고 한다. 출처: 운동할 때 신체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mercola.com))
수업을 마치고 그동안 썼던 연애일기를 그에게 공유했다. X는 내가 쓴 일기를 보고 감명 깊게 느낀 게 있어 보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다소 이기적으로 행동한 거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우울한 기분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오후에는 절친의 카페에 들러 수다를 떨었다. 크리스마스인데 절친도 가게를 봐야 하니 별개의 일정 없이 카페에만 붙어 있어야 했다. 그때 손님이 들어와 절친은 서빙하러 떠났고 나랑 X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점심 때 하다만 진지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X는 앞으로 상처 주는 멘트를 조심하겠다고 약속했고 컨디션에 맞춰 사랑을 나누자는 얘기도 했다. 대면으로 진정 어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기분이 묘하게 풀렸고 그의 진심이 느껴져 화난 것도 잊어버렸다. 우린 눈빛을 교환하다 입을 맞췄다. (카페 구조가 로비랑 안쪽 작업실로 나뉘어 있어 우린 작업실에서 단둘이 앉아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밤은 절친이랑 또 다른 몇몇 친구들을 불러 X랑 같이 소소한 송년 모임으로 마무리했다. 이번 한 해는 어땠으며 힘든 일이 있었는지, 다음 해는 어떤 계획과 노력을 할지 얘기했다. 특히 나에게는 직장 변동과 감정 사기를 당한 이슈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고 정리해 봤다. 다행히 연말에 X를 만나 위로가 되었고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해마다 카운트다운을 이 친구들과 보냈었는데, 올해는 각자 소중한 사람과 보내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절친도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나 또한 X랑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며 올해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었다.
31일 오전에는 헬스하고 재래시장에서 아점을 먹은 뒤 코인 노래방으로 향했다. 사귀기로 한 그날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노래방을 찾았다. X는 일반 노래방보다 코인노래방의 음향이 좋다며 연신 감탄했다. (난 그의 노래 실력에 연신 감탄했다 ㅎㅎ)
오후에는 노래방 옆의 카페에 들러 연간 계획표를 세웠다. X는 내년에 어떤 일이 있을 예정이며 어떻게 잘 헤쳐나갈지 꼼꼼히 적었다. (아무래도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한국에 남아서 비자를 신청할지 고민이 많을 때였다.)
저녁은 태국음식점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아직 배가 부른 우리는 볼링장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볼링을 치면서 스트레스를 날렸다. X는 한국에 와서 볼링은 처음이라며 어린애처럼 신이 났다.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느라 정신없었다.
볼링을 하다 보니 슬슬 허기졌는데, 음식점을 방문하기 귀찮아진 우리는 볼리장에서 피자를 먹으며 3게임이나 즐기다 거의 9시가 되어 귀가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사흘 만의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 썼던 새해 계획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20대 중반의 나이지만, X는 한국에 거주 중인 외국인으로서 고민이 꽤 많았다. 다음 학기의 논문은 제대로 완성해서 졸업할 수 있을지, 지금 하고 있는 직장을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향후 어떤 부업을 하면 좋을지, 한국에 남아서 비자를 받으려면 수업도 듣고 연봉이 어느 정도에 도달해야 하는지, 연애관계를 어떻게 잘 이어나갈지 등등.
어느새 30대인 내가 몇 년 전에 했었던 고민들을 X가 겪고 있었다. 인생 선배로서 해줄 말이 많아도 각자의 인생 방향과 바라는 바가 다르다 보니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도움을 요청하거나 고민을 털어놓으면 나의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도록 의견을 주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둘만의 공간에서 우리는 조용하고 진중하게 대화를 나누며 새해를 기대했다. 올해 연말은 딱히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지만, 잔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거 같다. 참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이렇게 소중한 사람과 마무리할 수 있어 훈훈하고 다행이다.
10, 9, 8, 7, 6, 5, 4, 3, 2, 1
해피뉴엘~
2023년의 새해가 밝았고 올해는 또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우리 사이도 오래오래 잘 이어가기를 바라며 같이 있는 순간들은 즐기기로 했다. 서로 사랑하면서.
에필로그:
나의 연애는 거의 한국에 유학 온 뒤로 펼쳐졌다. 성적 정체성을 확신하고 대학에 갔지만, 4년 내내 거의 양성애자 남학생 D를 짝사랑하면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남자를 만나 연애할 마음도 없었거니와 학교에서는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한국에 온 뒤로 나랑 같은 유학생 신분의 남자랑 연애했다. 게다가 마음에 맞는 상대는 다들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 있거나 같은 서울이라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던 친구들이다. 그들만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자취생이라는 것이다.
해서 연애를 할 때면 거의 주말을 남자친구의 자취방에서 지내곤 했다. 그런 점이 연애할 때 좋았던 이유 중 하나다. 학창 시절에는 거의 기숙사 생활을 했고 대학 졸업 후 취직했던 직장도 사내 숙소를 제공해 줬다. 한국에 유학 온 뒤로는 부모님과 쭉 같이 살다 보니 자취하고 싶은 로망은 여전했다.
그러다 X랑 사귀면서 생애 처음으로 8개월이란 자취(?) 같은 동거를 경험하게 된다. 다만, 자취란 정말 혼자 사는 자취가 찐 행복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