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자, 대신 좀 적당히
"나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한다!"
이런 표현은 조금 어색하고 이상하다. 내가 나를 반드시 꺾어야 하는 승부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가? 스스로 의지를 다진다는 관용적 표현이라 해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내가 나를 대하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요즘은 메타인지라도 있지, 이전에는 타도하고 넘어야 할 대상이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나는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일까 아니면 사랑하고 아껴줘야 하는 본체일까?
우선 나를 들여다보자.
도대체 나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가만히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일까? 남들은 모르는 진짜 내 속마음과 나의 실체를 만난다는 것일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겉으로 보이는 나와 속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현실에서의 나는 나름 긍정적이고 밝으며 진취적이다. 하지만 내면의 나는 적당히 비겁하고 음흉하며 부정적 소심덩어리 그 자체다. 어느 '나'가 진짜 나일까? 만약 어느 한쪽만 참이라면 나머지 한쪽은 자연스럽게 거짓이다. 그 판단을 극단적으로 내리는 순간 누구나 나르시시트가 되거나 지독한 염세주의자가 된다. 보통은 그 사이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간다.
대개 부정적인 자아는 감추고 싶어 한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가 느낀다. 하지만 부정적인 나를 부정적이지 않게 보면서 문제는 시작된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스스로를 높은 담에 가둔다. 약하고 여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겉으로 드러난 '나'는 더욱 힘을 낸다. 나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모두 올바르기에 이것을 나쁘게 생각하는 모든 것, 사회시스템이나 타인의 도덕적 기준, 관념 등은 나를 질투해서 파괴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스스로 절대선이나 도덕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대악에 맞서는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우며 반드시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 된다. 오히려 상대를 먼저 공격함으로써 나에 대한 방어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올바른 나를 보호하는 내가 멋지고 대견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지나친 자기 비하는 좋지 않다.
매사 부정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지나친 자기 사랑 역시 좋지 않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사랑은 그 반대생각에는 눈 감고 귀를 닫게 된다. 이런 경향이 지나치면 본인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 일명 카리스마라고 표현되는 큰 규모의 조직 리더들에게 이런 성향이 종종 목격된다. 그런 자신감이 조직이나 단체를 잘 이끌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심리 증상으로의 나르시시즘은 병리학적 현상이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전형이 나르시시스트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어 이는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우리는 자신을 아껴고 사랑해야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타인이 나를 사랑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지나치게 엄격한 것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도 문제다. 지나침은 아니함만 못하다는 옛말이 하나 틀리지 않는다. 역시 중도는 단순한 기계적 중립이 아니다. 아아, 너무 어렵고도 수준 높은 길이다. 그 수준에 미흡한 우리 중생은 아닌 딱 이 정도 수준이면 어떨까? 기본적으로는 나를 사랑하되, 나를 너무 몰아치지는 말자. 지금 우리가 TV를 통해 보는 몇몇 정치 사회 지도자를 보자. 병리학적 수준은 아니라도 문제가 많은 나르시시트가 보이지 않은가.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이렇다.
나를 사랑하자, 대신 좀 적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