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왜 이렇게 해야 할 게 많을까.
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이나 일상과 아주 밀접한 결과물이 디자인의 대상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제품이나 서비스는 다양한 영역으로, 여러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당연히 영역이 넓어지고 사람의 기호가 변하다 보니 비례해서 따져야 할 것이 많다. AI의 도움을 받으면 개별적인 기능에 대한 도움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총괄적인 관점과, 반대로 아주 미세한 영역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임을 안다.
여기에 사용자 경험 같은 아주 사적이고 일시적인 개념까지 더해진다.
만드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판매와 매출이라는 치열한 상업적 결과까지 실적의 범위에 들어가니 이는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 디자인 산업의 미래와 디자이너의 업무역량은 어디까지 확대될까.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에서 제너럴리스트(Generallist)가 되는 것은 아닐까.
직업으로써 디자인은 참 골치 아프다.
한 번 익힌 기술이나 정보, 지식의 유통기한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면 체력의 소진과 정신의 휴식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디자인은 프로젝트가 나란히 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서로 겹쳐서 온다. 사람이나 기계나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서는 적절한 휴지기가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디자이너는 한창때인 30대 정도에 그냥 소진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젊은 20대 학부생들도 과제나 공모전을 위해 밤을 새우는 것을 기본 소양쯤으로 여긴다. 당장은 젊은 육체니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몸을 좀먹고,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행위다.
그렇다고 디자인이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누가 디자인을 하고 있겠는가? 남자들이 말하는 군대 이야기와 얼추 서사 구조는 비슷하다. 힘든 일상을 보상해 줄 수 있는 달콤한 열매가 있다는 것이다. 군대는 시간이 지나면 계급이 올라가면서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 그럼 디자인은 어떨까. 내 생각에 디자인은 내 손을 거친 최종 결과물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 세상없는 달콤한 열매다. 클라이언트와의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해도, 계약이 끝나면 서류상으로는 완전 남남이 되는 사이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디자인은 또 다른 얘기다. 마치 이혼한 부부 사이에 자식이 갖는 의미와 유사하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하지만 이제는 그 효율의 가치도 떨어진다.
디자인의 결과물이 디자이너 개인의 손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복잡한 이해관계자들 간의 결과로 나온다. 딱히, 내 핏줄이라는 생각을 억지로 하지 않으면 팀이나 조직의 결과물이다.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경제적 활동으로만 본다면 철저하게 효율을 따져야 한다. 예전과는 다르게 디자이너를 바라보는 MZ들의 관점은 다르지 않겠는가. 다른 것이 당연한 것임을.
디자이너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디자인의 영역 언저리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 생각해 보면 어떤 산업영역에서 디자인은 존재한다고 본다. 이제 그런 시대가 되었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동기들이 많다. 젊었던 그 시대에, 그 친구들은 스스로 디자인을 포기하거나 안 한다고 말했었다. 당시에는 2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의 이 시대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는 디자인이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오퍼레이터로서의 기능중심 디자인에서 기획이나 융합으로서의 디자인으로 생각을 확대한다면 디자인은 공기처럼 여기저기에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처럼 빠른 속도를 가진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서 있을 수만 있다면 거기에도 디자인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거기서 내가 할 어떤 종류의 일도 디자인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평생 디자인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디자인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변방에서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면 살아왔다. 마치 지구가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우주에서 지속적으로 바뀌는 위치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
세상 어디에라도 사람은 산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사람의 생각이 있고, 거기에는 단순한 발상부터 창의적인 생각에 이르기까지 존재할 것이다. 그럼 이곳저곳에 디자인이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서 뭔가를 만들거나 기획하고 소통하는 모든 행위는 디자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도 여전히 디자이너로 살아갈 것이다.
아주 좋은 직업 아닌가,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