쭌코는 작년에 품절남이 됐다.
쭌코를 구원해 준 그녀는 원래 나의 라이벌(?)이었다.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녀는 나의 첫 운동 라이벌이었다. 크로스핏 초기에 너무 힘들어서 누구 하나를 먼저 이겨봐야겠다는 허황된 목표를 세웠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가장 만만하게 보이던 여자 회원이 하나 있었다. 당시 내 눈에 그녀는 날씬하다 못해 아주 말라 보였다. 그래서 저 아가씨를 가장 먼저 이겨보자는 생각을 했지만 말도 안 되는 건방진 발상이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못한다. 그런 나의 운동라이벌이었던 그녀가 지금은 쭌코의 신부가 되었다. 아니, 쭌코가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그녀의 이니셜은 E다.
지금은 내가 오전반에서 롱런하는 멤버가 되면서 쭌코는 물론 E와도 아주 친하다. 그래서 초창기 내가 가졌던 무모한 생각도 웃으면서 고백했다. 크로스핏 초기에는 모든 것이 힘들었다. 당연히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한두어 달 정도 지나니 이상한 오기 비슷한 것이 생겼다. 당연히 나는 여자들과 팀이 되어서 운동했다. 몇몇은 아주 쳐다보지도 못할 수준이었지만 어떤 여자 회원들은 한 번 정도는 승부(?)를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존감이 너무 무너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가소롭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운동 관록이나 짬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E는 정말 가냘프게 보였다.
보통 크로스핏을 하는 여자는 첫인상이 다르다. 그리고 운동을 수행하는 자세나 퍼포먼스를 봐도 아주 체계가 잡혀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반면 필라테스와 요가를 오래 했다는 E는 순정만화에 나올법한 체형을 가졌다. 그런데 결과는 의외였다. 언젠가 한 번 팀으로 WOD를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정확히 어떤 종목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토할 뻔했다는 것은 기억한다. 사람이나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겉에 눈으로 드러나는 것과 실제는 아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크로스핏은 종합운동이다.
순간의 근력 못지않게 근지구력이 발달하는 종목이다. 그래서 웨이트트레이닝 같은 운동을 하던 사람이 체험을 오게 되면, 첫 세트와 둘째 세트에는 힘을 발휘하지만 세트 수가 늘어나거나 횟수가 더해질수록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크로스핏을 하는 사람들은 WOD 종료 휘슬이 울리면 헉헉대며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 정해진 시간 내에는 정해진 운동을 수행해 낸다. 짧고 굵게! 이게 딱 크로스핏의 원칙 같다. 아니, 다시 말해야겠다. 짧고 아주 굵게로!
E 역시 전형적인 외유내강이다.
겉으로는 힘들어하는 듯하지만 그날 WOD의 세트가 끝날 때까지 절대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당시 속으로 E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 운동을 마친 후 스트레칭을 하는데, 쭌코와 E의 터치가 좀 심상찮았다. 일반적으로 운동코치와 회원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무슨 대수랴. 게다가 코치와 회원의 나이 차이가 많지 않으면 친구처럼, 선후배처럼 친한 것이 자연스럽다. 운동 후 스트레칭을 하게 되면 코치가 회원을 도와주는 것도 당연하지만 쭌코와 E의 터치는 일반적인 상식 그 이상이었다. 조금 의아했다. 아주 많이 친하더라도 조금 그 선을 넘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에도 쭌코와 E는 연인사이였다. 그럼 그렇지.
E는 운동 이외의 삶에서도 다부진 캐릭터다.
아니, 크로스핏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실의 삶이 다부지다. E가 특별하게 생각된 것은 그녀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사업계획서나 연구개발 기획, 컨설팅 업무를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오전반 멤버들과 비즈니스 관련된 얘기를 할 때가 있다. 나는 생각을 글이나 디자인 등으로 표현하는 일을 하지 않은가. 그래서 잠깐 들어본 E는 생각이 아주 깊었다. 쭌코와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 하나하나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본 E는 금 관련 투자(가업이 귀금속 계열이다)와 정보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있었다. 그쪽으로는 젬병인 나로서는 E가 더욱더 대단해 보였다.
쭌코는 기술이 좋은 사람이다.
센스도 좋고 세상일에 관심도 많다. 좋은 손재주만큼 넉살도 좋다. 그러다 보니 참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외향형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관리형 파트너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E는 아주 최상의 반려자다. 처음 둘의 교제 사실을 알았을 때 무릎을 쳤다.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와 쭌코와 나는 별도의 단톡방이 있다.
간이 사업자를 가진 E는 나름의 포부가 크다. 실행은 쭌코가, 계획과 관리는 E의 몫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약간의 정리나 아이디어 제공 역할을 한다. 사실 오전반에는 다양한 형태의 자영업자들이 많다. 같이 땀 흘려 운동하는 사이에는 상대를 속이거나 해를 가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즐거운 인생(2007)』가 생각난다.
영화는 정진영, 김윤석, 김상호 배우가 대학 시절 밴드 '활화산'의 멤버로 출연해 다시 밴드를 결성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극 중 중고차 매매상인 혁주(김상호 분)가 손님에게 차를 팔면서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손님이 드럼을 친다고 하자 혁주의 대사가 이렇게 나왔다.
"드럼? 아, 나도 음악 했었는데. 내가 드럼이었다고, 드럼! 어,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안 속여, 어? 믿고 사도 돼. 내가 악사들한테 차를 얼마나 많이 팔았는데. 어? 어, 차 좋잖아, 그렇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가냘프게만 보였던 다부진 E가 그랬다. 그래서 더욱 E에게는 아직 보여주지 않은 또 다른 매력과 강점이 있을 것이다. 사람 간 관계 역시 보이는 면은 실제 그 사람 전체의 아주 일부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기도 하고 새로운 관계에 많은 기대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쭌코의 사모님이 된 E 역시도 두 가지, 세 가지 삶의 목표가 새롭게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E는 목적한 결과를 이루어낼 것이다. 이제는 E를 부르는 타이틀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쭌코의 그녀 E가 아니라, E의 남자 쭌코로!
조만간 성공할 E와 더욱 친한 척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