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블루홀 } 6화

XYZ0

by 슴샥

"이거 뭐냐니까요, 리버? 이 비행기표 이거, 런던 가는 비행기표. 그리고 한밤중에 무슨 짐을 이렇게 열심히 싸고 있어요? 내일 해요. 내일 날 밝으면. 무슨 야반도주하는 것도 아니고.


"..."


"뭐야? 설마, 야반도주라도 할 작정이었어요?... 아, 왜 대답을 안 해요? 한국말 못 알아 들어요? 야반도주. 한밤중에 남들 몰래 튀는 거."


"..."


"이봐요, 리버!"


"내가 야반도주를 했다 소문을 낼 작정인가 본데, 참아줬음 좋겠군. 안 그래도 어수선한 동네에 나에 관한 소문까지 보탤 필요는 없지 않나?"


"뭐예요?"


"앞으로 블루홀 입수가 금지된다면, 그건 순전히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이겠지."


"나 같은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지어내길 좋아하는 사람들. 검증도 안된 이야기들을 옮기느라 바쁜 사람들."


"내가 야반도주라는 단어를 썼다고 화가 난 모양인데. 그렇다고 그렇게 쏘아붙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게다가 아까부터 거짓말, 거짓말, 하는데, 그건 내 얘긴 하나도 안 믿는다는 뜻이잖아. 나 진짜로 봤다구요. 그것도 똑같은 장면을 두 번씩이나. 아까도 말했죠? 지난번 쌔들 근처에서 고꾸라졌을 때, 또 아까 낮에 블루홀에서... 듣고는 있어요?"


"그 얘긴 그만 하지. 30 미터 근방이었지 않나? 질소마취가 시작되기 쉬운."


"그야 그렇지만..."


"그 부근에서 다들 비슷한 경험들을 하곤하지. 머릿속이 몽롱하고, 숨이 가빠지고, 심지어 웃음이 터져 나온다는 사람도 있어. 헛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물론이고."


"아뇨. 그 딴 거랑은 전혀 달라. 훨씬 더 선명하고, 생생하고, 바로 내 눈앞에 실존한다구요. 머릿속이 아니라. 이렇게 생겼어요. 내가 봤던 그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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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뒷주머니에서 멋대로 빼낸 비행기표 뒷면에 나는 볼펜을 휘갈겼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었다.


내일의 계획을, 샤름 엘 셰이크에서 카이로를 거쳐 런던으로 가려는 그의 일정을.


삐뚤빼뚤 엉망진창인 그림.


낙서와도 같은 그 그림에 시선을 한 번이나 주었을까.


리버는 여전히 짐 챙기기에 바빴다. 방에 그의 물건이라고는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보라구요, 리버. 이게 내가 봤던 거예요. 도로 표지판. 이렇게 생긴, 가운데 도로명이 적힌, 커다란 표지판."


"... 엑스. 와이. 제드... 그 옆에 건..."


"숫자죠. 숫자 영."


"그걸 믿으라는 건가? 엑스. 와이. 제드. 지로? 이런 도로명이 세상에 있다고?"


"진짜라니까 그러네. 표지판뿐만이 아니었어요. 소리도 들렸다구요. 크리스마스 캐럴..."


"후..."


그의 짤막한 한숨이 절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떠나려 하고 있었다.


리버...


/ / /


하늘엔 가느스름한 달.


밤이 한창이었고, 그날따라 숙소는 고요했다.


방에는 그가 지녔던 어떠한 물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마치 다합에 머물렀던 시간 전체를 고스란히 챙겨가려는 것처럼.


그 생각을 하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안해졌다.


우리가 두 번 다시는 못 만날 거라는 예감에 완전히 사로잡혀서는.


"이유라도 말해주면 안 돼요, 리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어제, 아니, 오늘 하루 종일 떠난다는 얘기도 않았으면서. 안톤처럼 당장 비자가 만료되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도 희멀건한 그의 얼굴이 유독 창백해 보였고, 문득, 그가 아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몸이 안 좋아요? 급히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거나."


"... 집"


"집? 방금 집이라고 했어요? 부모님 집에라도 가는 거예요?"


"... 알리시아."


"뭐라고요? 하나도 안 들려, 리버. 크게 좀 말해봐요."


"알리시아의 집을 찾아갈 계획이라. 덜위치 ( Dulwich ) 어디쯤이라고 했지 아마..."


"뭐야.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집을 찾아간데?"


"우리에겐 공통의 지인이 있어. 알리시아의 시스터와 친분이 있는. 도착해서 그를 만나면 되겠지. 알리시아가 사망했다는 소식, 아직 모르고 있을게 분명해.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고 했으니까. 시스터를 제외하고는...... 내가 어쩌자고 이런 얘길 당신에게까지..."


"무슨 사이였어요? 알리시아 그 여자랑? 둘이 사귀는 사이였어요?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


"아님 그냥, 리버 혼자 좋아했던 거?"


"..."


"아, 대답 좀 해줘요!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그때 내 목소리가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침착해야지, 마음을 다잡았으나, 마음이 영 말을 들어먹지를 않았다.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내 몸 역시도.

내 손이 멋대로 리버의 팔목을 붙들었고, 다음 순간, 내 손아귀에서 그의 팔목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툭, 하고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뒤따랐다.


리버가 항상 팔찌처럼 감고 다니던 가죽끈. 그 끝에 달린 자물쇠.


사막에서 보았던 그 자물쇠였다. 4 자리 비밀번호를 가진.


당황한 나는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그에게 자물쇠를 내밀었다. 받아주지 않았음에도 불과하고.


"왜 안 받아요? 이 자물쇠 이거, 이제 필요 없어졌어요?"


"..."


"홍해에 다이빙 나갔다가 건져 올린 물건이라면서. 그래서 소중하게 몸에 지니고 다니던 거 아닌가?"


"베두인족 전설! 그거 내가 알려준 거라고!" 리버가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낮에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던 것처럼. "내가 알리시아한테 말한 거야! 시나이 사막의 베두인족 마을에 전해져 오는 말도 안 되는 그 미신! 소원을 빌고 아치를 통과하면! 아치를 통과해 블루홀로 들어가면! 보인다고! 사람 얼굴이건 숫자건 뭐 건간에!"


"지, 진정해요, 리버. 갑자기 소릴 지르면 어떡해."


"그 빌어먹을 자물쇠! 알리시아가 풀어버렸다고!"


"그게 무슨."


"자물쇠 비밀번호! 아무도 모르는 비밀번호!"


"그러니까. 알리시아 그 여자,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고는..."


"블루홀에서 봤다나, 젠장!"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다합의 밤바람이 나무 창문을 흔드는 소리였다.


/ / /


긴 가죽끈 끝에 달린 자물쇠가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창밖으로 날아갔던 장면을 나는 기억한다.


그의 마지막 모습과 함께.


"환각을 본 거겠지. 질소중독 상태에서. 사랑, 당신도... 또 알리시아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방을 나갔다.


가지 말라고. 제발 거기서 멈추라고.


그런 말을 했더라면 후회가 덜했을까.


나는 쿨하고 싶었고,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때 당시에는 몰랐다. 내가 그를 그렇게까지 보고파하게 될 줄은.


그 후로도 그전으로도 그토록이나 그리워했던 사람은 없었다.


친구라던가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한때 부부로 연을 맺고 살았던, 내 전남편을 포함해서.


그리고 이십 년이 조금 지난 지금.


나는 SNS에서 사진 한 장을 보았다.


한여름의 옥빛 바다를 배경으로 도로 표지판이 커다랗게 찍힌.


' XYZ0 '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화제가 된 어느 섬의 해안도로.


그 사진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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