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 오늘.
리버...
그에 관한 나의 해석은 항상 같다.
정말 착한 사람이야.
알리시아의 유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이집트 다합에서 런던까지 직접 달려갔잖아? 뭐. 지금이야 스마트폰이다 뭐다 연락 방법이 수두룩해도, 20 년 전엔 전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 해석은 머잖아 방향을 틀어버린다.
착한 사람은 무슨.
완전 나쁜 놈이지. 헛소문의 진원지가 본인인 게 들통날까봐 야반도주를 한 거잖아. 기억 안 나? 그 사람 떠난 바로 다음날. 경찰이 찾아왔던 거. 다이버들이 죽어나간 거. 네가 모르는 부분이 더 있었을 거야, 필시.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적 사고의 결론이 늘 똑같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곤 했다.
그랬다.
늘 결론은 하나였다.
그가 보고 싶었다.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오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순간, 손잡이를 놓치고 마는 나.
텅! 텅! 텅!
요란스러운 소리.
알루미늄재질의 내 여행용 트렁크가 돌덩이에 사정없이 부딪히는.
서울에서부터 남태평양 한복판까지, 멋모르고 따라온 내 불쌍한 트렁크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였다. 해안도로 끝자락에서 아래쪽의, 석양에 물든 바다로.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아프게 느껴졌다. 내 가슴에 못질을 하는 소리 같달까.
/ / /
나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전남편이 치를 떨었을 정도로.
내가 봐도 그랬다.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는 것쯤,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어느 외딴섬이란 사실 정도는.
그런데도 이 모양이다. 그깟 트렁크, 잃어버렸다 치면 그만인 것을.
그걸 기어이 찾아내겠답시고 이 난리다.
차는커녕, 인적이라곤 없는 장소를 뭘 어쩌겠다고. 하다 하다 해안도로의 가드레일을 훌쩍 타 넘어버렸다. 그 상태로 비탈을 타고 내려 가 바닷가 근처를 두리번두리번-
그러다 보니 밤이었다.
하늘에 눈썹달이 걸린, 습한 여름밤.
함박눈이 한창이라는 한국과는 정반대의.
"안돼! 꼭 찾아야 돼! 내 트렁크! 거기 들어있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밤파도에 잡아먹혔는지 말끄트머리가 희미해지긴 했지만.
아무튼.
애써 챙겨 온 자물쇠가 트렁크에 들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리버가 내팽개치고 가버린 그 자물쇠말이다. 홍해에서 건져 올렸다는.
그 얘길 해줘야 하는데! 리버를 다시 만난다면 자물쇠 얘길 반드시 들려줘야 하는데!
알리시아가 그 자물쇠를 풀었다는 건, 다른 다이버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일화였다.
하지만, 리버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힌트가 있었던 것이다. 자물쇠의 비밀번호가 되는 힌트.
뭐라더라? '이기적인 숫자들의 조합' 이라나?
알리시아 그 여자, 분명 그 힌트를 바탕으로 자물쇠를 풀었을 거라고. 블루홀에서 신기루를 목격한 게 아니었을 거라고. 그러니 리버가 죄책감을 가질 일 따위 애초에 없었다고.
해가 뜨려는지 주변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 / /
간신히 트렁크를 찾아냈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발걸음이 풀린 상태로 해안도로를 계속 걸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렇긴 한데...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밤을 꼴딱 새운 꼴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래서일까. 노랫소리에 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캐럴이라니...
멈추어 서고 말았다.
해안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나란히 세워진 표지판 두 개.
공사 일정 표지판. 도로명을 나타내는 표지판.
XYZ0 이라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름의 도로.
멀지 않은 곳에 쇼핑몰이라도 있는지 크리스마스캐럴이 명확하게 들려왔다.
SNS에 올라왔던, 그 짧은 영상 그대로였다.
/ / /
XYZ0
그 황당한 도로명을 눈이 아프도록 노려보았다.
설이 여러 개였다. 연구소 자리였다는 둥. 군사기지가 있었다는 둥. 실체가 없는 소문들이 SNS를 쓸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웃음.
그 웃음소리!
…
여름이 나를 붙잡아 세운 것만 같았다. 여름을 닮은 그 웃음이 나를 뒤돌아보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내 두 발이 도로 위에 달라붙어버렸다.
도로를 왔다 갔다 하기 바쁜 조그만 그림자를 응시한 채 바싹 굳어있는 나였다.
공사중인 아스팔트 위를 신나게 뛰어다니는 소년. 그 조그만 아이가 흥에 못 이겨 지르는 경쾌한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아이가 달려감과 동시에.
그리고 내 이름을...
'BORA?' 하고 내 이름을 영어발음으로 부르는 남자 목소리.
내 캐리어 손잡이 부분에 걸어둔 커다란 네임 태그.
거기 적힌 'BORA' 라는 내 이름.
그걸 읽는 소리였다.
/ / /
뭔가 말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이 나오려다 말고 목구멍에 걸려 달랑거렸다.
혹은 입술언저리에 붙어버렸는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이 남자는 내가 기억하는 그가 아니었다.
리버...
라는 그 이름으로 결코 불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운드를 떠올리게 했던 마른 체형은 살이 올라 두루뭉술해졌고, 희멀겋던 얼굴은 볕에 심하게 그을려있었다.
눈썹에는 듬성듬성 새치가 내려앉아 짙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얼마간이나 지켜봤을까.
내 입에서 '사랑' 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내가 직접 지은 이름. 오직 나를 위한 내 이름.
다이빙을 배우던 내내 저 남자는, 과거의 리버는, 나를 사랑이라 불렀으니까.
"사... 랑..." 떨리는 내 말소리.
"B O R A ?" 내 이름을 확인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몇 번을 말해본다.
하지만.
'보라'라는 이름만 계속해서 들려왔다. 엉뚱하게도.
나를 캐리어나 두고가는 관광객 취급이라니...
이십 년이란 시간이 그를 멀리로 보내버린 것만 같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버렸다. 씁쓸한 나머지.
시간의 힘을 과소평가한 대가였다.
/ / /
아들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내가 당신을 잊었다면 내가 아니라는 건데'
사막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떠오르기 무섭게 여름의 바다로 흩어졌다.
명확히 해야겠다.
이십 년 전 블루홀에서 본 신기루는 다름 아닌 나였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를 두고 돌아서는 나의 모습을, 나는 보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