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컨설턴트 니키의 얄궂은 하루
냉장고 두 개쯤은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의 상자가 완전히 터져버렸고, 바닥에 물건들이 난무했다.
영화관에나 어울릴 영사기 하며, 세발자전거, 두 발 자전거, 한발 자전거, 자전거 핸들, 자전거 체인, 어린이용 카약과 패들, 구명조끼, 잠자리채, 살이 부러진 파라솔, 돗자리, 비닐우산, 각종 드라이버, 망치에 톱, 전동드릴에다 크기가 다른 드릴빗이 수북하게, 그 위로 나사못 한 무더기가 와장창...
"이 할아버지가 진짜! 뭔 사고를 친 거야!"
화를 간신히 억누르는 니키. 뿌드득, 이빨 가는 소릴 낸다.
"자네, 나한테 욕을 하는 겐가?"
"욕이라뇨?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성질 한 번 고약한 젊은이로구먼. 늙은이가 실수 좀 한 걸 가지고."
"할아버지한테 성질낸 거 아니거든욧!"
"이 장소에 우리 둘 말고 다른 누가 또 있나?"
"아이씨... 그런 게 아니라요, 저 혼자 정리하기엔 엄두가 안 나니까... 모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본인 집 뒷마당에 있는 창고를 정리하는 일을 의뢰하는 거라고. 그런데 이게 뭐예요? 뭔 놈의 창고가 이렇게나 크냐구요. 천평이나 되는 규모인 줄 알았더라면, 수거팀을 불러뒀을 거라고요. 덕분에 일을 여러 번 하게 생겼잖아요. 수거팀 어레인지하려면 미리미리 스케줄 빼둬야 하는 건데... 아이씨... 진짜 뭔 놈의 물건이 이렇게나 많아..."
무릎높이까지 쌓여있는 물건더미에서 니키가 뭔가를 집어든다.
잡동사니 속에 처박혀있던 인형이었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안티크 도자기 인형.
베개정도 되는 사이즈에 만듦새가 정교했고, 금발 역시도 풍성한.
"대박! 이거 유럽에서 보던 도자기 인형이잖아? 광택이 장난 아니네. 언제 넣어놓은 물건이길래 아직도 반질반질 윤이 나지?"
인형의 뺨 부분을 조심스럽게 문질러보는 니키. '귀엽다'라는 감탄사를 수차례나 반복한다. Q 가 티 나게 입을 삐죽거리는데도 불과하고.
"제가 독일에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요, 이 도자기 인형, 백퍼 독일에서 만든 거예요. 어디서 만들었을까 그것까진 확실치 않지만. 드레스덴? 하인츠? 프렝켄탈?... 할아버지도 이리 오셔서 구경 좀 해보세요. 이 인형 이거, 완전 귀엽다니까요."
"귀엽기는... 얼어 죽을..."
"어머? 할아버지 눈엔 이 인형이 하나도 안 귀여운가 봐요?"
"하여간 요즘 것들은 말이지. 귀엽다는 표현에 미쳐서는, 여기서도 꺅. 저기서도 꺅. 호들갑들을 떤다니까. 그 싹퉁머리도 그러더구먼. 일전엔 황소를 가리키며 꺅꺅대지를 않나. 귀엽다네 어쩌네 하면서. 옘병. 덩치가 자기 몸의 곱절은 되는 황소한테, 귀여워 죽겠다는 게 말이 돼? 그 싹퉁머리 그거, 옆집 강아지를 보고는 일절 귀엽단 소릴 안 하더구먼. 덩치가 자기 반도 안 되는 동물인데도 말이지."
주름진 입술로 빈정대는 Q. 그러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온다.
"도베르망이걸랑. 옆집 강아지. 자라긴 덜 자랐어도, 짓긴 된통 사납게 짖어대지. 거기다 대고 차마 귀엽단 소린 못하겠는지, 빌빌대더구먼."
"아까부터 싹퉁머리, 싹퉁머리 하시는데, 그 싹퉁머리라는 단어, 모교수님을 뜻하는 건가요?"
"그래. 그 싹퉁머리 그거. 귀엽다는 단어를 본인보다 약하다는 의미로 쓰더구먼."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교수님 눈에 귀여워 보였으니 귀엽다 표현을 하셨겠죠."
"자네, 사회학 박사씩이나 했다면서, 보는 눈이 영 꽝이구먼. 본인한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대상에 국한해서 귀엽다가 성립한단 말이지."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니키. 왼손을 대각선 방향으로 잽싸게 뻗는다. 인형을 쥔 상태로.
Q가 인형을 낚아채려던 것을 순발력 좋게 방어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할아버지. 인형에 관심 없으시다면서 왜 갑자기..."
그러나, 인형 쪽을 향해 팔을 더욱 뻗어오는 Q.
"이리 내놔! 당장!" 하면서 목이 쉬어라 고함을 지른다.
"인형은 쳐다보지도 않으셨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데요?"
"옘병!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물건을, 누구 맘대로 버리겠다 설쳐, 설치기를!"
"왜 자꾸 저한테 욕을 하세요? 전 그저 제 할 일을 하는 것 뿐인이라고요. 정말 성격 이상하시네. 지금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쓰지도 않고 처박아둔 물건, 버리는 수고를 대신해 주러 온 사람인데."
"처박아뒀다니?"
"딱 봐도 그렇잖아요. 에라 모르겠다, 창고에 처박아버린 물건들 투성이..."
"닥쳐!"
"닥치라뇨? 이 할아버지가 진짜."
"모르는 거야! 여기 있는지를 까맣게 잊어먹은 거라고!"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고 싶은 거겠죠. 모르고 싶어서, 그냥 이 딴 데 처박아둔 거겠죠."
"이년이 이거..."
"어디다 대고 이년 저년 하시는 거예요? 제 이름은 니키라구요! 정리 컨설턴트, 니키!"
와장창.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천장으로 치솟는다. 온실 천창에 튕겨 메아리를 만든다.
인형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니키가 인형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Q의 뜬금없는 흐느낌. 인형 파편을 휘적이는 니키. 파편에 묻힌 지폐뭉치를 집어든다.
돈다발이었다. 제법 묵직한.
"이거 뭐예요, 할아버지?"
"내놔! 내 돈!"
"이 돈다발 이거, 할아버지 거였어요? 그래서 오버하신 거세요? 인형 속에 숨겨둔 비상금 들킬까 봐?"
"내 돈에서 손 떼라니까!"
"응?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이 지폐 이거, 세종대왕님 복장이..."
"당장 손 떼래도!"
덤벼드는 Q를 가볍게 피하는 니키. 손에는 여전히 돈다발이 들려있다.
"자네, 귓구멍이 막혔나? 손 떼라는 말 안 들리나?"
"진정 좀 하세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뿐이잖아요. 안 훔쳐가요. 이깟거, 몇 푼이나 된다고."
"이깟거라니, 그거면 차도 사고, 집도 사고..."
"뭘 산다구요? 차? 집? 하하!"
헛웃음이 터진 니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Q를 보자, 웃음이 더 나온다.
디자인이 바뀌기 이전의 화폐. 80 년대? 혹은 70 년대에 유통되었을. 그걸 여태껏, 이토록이나 소중하게 감춰온 노인이라니. 우직하달까. 미련하달까. 딱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할아버지도 아실 텐데요. 대한민국 물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이 돈으로는 집은커녕 자동차도 한 대 못 사요. 할아버지가 싹퉁머리라고 부르시는 그 모교수님. 그분이 요즘 끌고 다니시는 외제차, 아니죠, 그 외제차랑 똑같이 생긴 차인데, 사고로 한 열 번쯤 꼬라 박은 중고 버전을 사겠다고 돌아다닌데도 한참 모자라는 금액이에요. 인플레이션이란 게 그래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거라구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돈의 가치가 얼마나 하락하는지... 어머?!"
찰나의 순간, 그녀의 손 안에서 사라져버린 돈다발.
Q 가 요술이라도 부린걸까? 그의 손에 돈다발이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