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이집트 다합
사랑.
그건 내 이름이었다.
내가 손수 지었던,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한 이름.
꽤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곤 했었다.
전 남편이란 작자에게서,
'사랑? 그딴 게 어떻게 네 이름이야? 필명 좋아하시네. 사진집 좀 팔린 걸 가지고는'
라는, 악의에 찬 조롱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래.
그때 즈음이었지.
기껏 지은 이름을 버리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되돌아갔던 거.
보라.
라는, 주민등록증에 찍힌 이름을 다시 쓰기 시작했던 거.
하긴. 지금 상황에 이름 같은 게 뭐 중요하겠어.
내가 '사랑'이라 불리던, '보라'라고 불리던, 뭔 상관이겠느냐구.
나를 정신줄 놓은 여자로 보는 건 변함없을 텐데. 한여름의 태양이 이글대는 해안도로를 혼자 걸어가는 40대 여자를 세상은 결코 멀쩡하다 말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걷고 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흩뿌려진 어떤 섬 위를.
제정신이냐 묻는다면, 아닌 게 맞다.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그렇다 믿었던 이름이 다시 등장했고, 곧바로 달리기를 시작했으니까. 크리스마스 파티장을 무작정 뛰쳐나와 인천공항으로, 미친 사람처럼 항공권을 예매해서는, 일본을 경유해 보라보라섬으로, 페리에 올라타서는 이 외딴섬까지...
어휴...
문득 후회가 밀려온다.
불쌍한 내 발바닥. 가엾은 내 트렁크. 게다가 덥다. 더운 데다 습하다.
구름 사이로 마치 누군가 불씨를 헤집어놓은 듯 일몰이 장난스러워 보였고,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스멀스멀.
나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기억이었다.
/ / /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일이었다. 대략 이십 년 전쯤의?...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쩌다 이집트란 나라에 흘러들었는지가 희미하다. 인연이었으려나? 그 남자와 만나게 될.
아니다.
이딴 건 전부 나 홀로 의미부여에 불과했지, 사실상 의미 같은 건 없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당시의 이집트는, 다합이란 그 작은 동네는, 그저 값싸게 오래 머물 수 있는 여행지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
말이 세계여행이었지 대학 졸업 후 이렇다 할 직업 없이 떠돌던 나였다.
아무튼.
거기서 그를 만났다.
나의 다이빙 선생님.
리버...
희멀건한 얼굴에 짙은 눈썹.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에 그레이 하운드를 연상시키는 체형.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남자.
처음엔 그를 동포쯤으로 여겼다. 여행 중 마주쳤던 여느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해외동포.
그 정도로 별 감정 없었다. 한국말을 쓴다는 점 이외에 그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러다 언제쯤이었지? 확실히 내쪽에서 먼저 다가갔던 것 같은데.
호텔 창고에 덩그러니 서있는 그를 보며,
"저기요. 스쿠버 다이빙 좀 배워볼까 해서 묻는 건데요."
하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었다.
"무리지."
라는 대답이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심지어 되물었었다.
"호텔방에서 혼자 열흘 넘게 뭉개고 있으려니 심심해서요. 이참에 다이빙이라도 배워두면 좋잖아요? 어차피 9월이나 되어서야 다합 뜰 텐데."
라는 식으로.
하지만,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무리라는 말만 반복하는 그였다.
듣다 못한 내 입에서,
"무리라니? 나 같은 사람은 스쿠버 다이빙 배우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요?"
하고 날카로운 반박이 튀어나올 때까지.
한바탕 퍼부으려는데, 웬 덜그럭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창문에 매달린 자물쇠를 잡아 흔드는 소리.
가만 보니 자물쇠를 칭하는 말이었다. 자물쇠 푸는 일이 무리라는 의미 같았다. 나에게 스쿠버 다이빙을 가르쳐 주는 일이 아니라.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내 목에서 나갔다.
"그깟 자물쇠, 사람들 불러 뜯어버리면 될 걸 가지고 뭘 난리야. 당신 호텔 직원들이랑 친한 사이 아니었어요?"
"친한... 사이?..."
"친한 거 맞죠. 그러니 맨날 뭉쳐들 다니지."
"누구..."
"누구긴 누구야. 당신이랑 매일 하이파이브를 해대는 남자들이지. 안톤이라던가? 요아킴? 또 누구지? 콧수염 기른 스페인 남자?"
"수염?... 올리를 말하는 건가?..."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군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 그 호텔 직원들, 당장 불러다 확! 뜯어버리라고요! 그깟 자물쇠!"
"... 다이버..."
"뭐라고요?"
"다이버들. 호텔 직원들 아니라. 모두 다이버. 나랑 다이빙하는. 비아트리즈. 펠릭스. 올리. 가브리엘. 안톤. 거기다 또 한 명..."
"저기, 이봐요!"
"한 명... 한 명 더 있는데..."
"도대체 뭐라는 거예요?"
"알리시아!"
그 단어와 동시에 그가 손뼉을 쳤다. 알리시아라는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그리고는 웃었다.
/ / /
살면서 그런 웃음을 또 본 적이 있을까?
창밖이 온통 여름이었고, 바다가 지척이었다. 꼭 지금처럼.
물론 다합의 바다는 내 기대보다 훨씬 황량했지만.
그래도 거기엔 그가 있었다.
여름을 닮은 웃음을 웃는 남자.
그 부풀어올라 터져버릴 것만 같은 웃음이, 나는 좋았다.
이십 년이나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