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쌀밥

by 고미젤리

시어머니 생신이다.


시어머니는 무슨 절기나 명절의 특별한 음식을 꼭 챙긴다. 하지만 그날을 너무 기다려서 인지 꼭 미리부터 서두른다. 동지 팥죽을 3일 전에 미리 먹고, 정월 대보름 오곡밥도 일주일 전에 이미 먹는 것은 물론, 송편이나 떡국도 며칠 전 먹고 나서 당일날은 질린다고 잘 안 드신다.


생신은 무조건 흰쌀밥이어야 한다. 결혼 초 내가 현미를 조금 섞어 밥을 했더니 생일 상 앞에서 서럽게 우시기까지 했다. 마침 며칠 뒤 시이모님이 놀러 오셨다가 다 같이 보리밥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모님은 음식들이 정갈하고 건강해 보인다고, 애들 모두 일하느라 바쁠 텐데 생일 때 이렇게 밖에서 먹지 그랬냐고 하셨다. 시어머니는 누가 생일에 잡곡밥을 먹냐며 나 들으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이모는 ‘요즘 못 먹고 못 살 때도 아니고 건강에 좋은 밥 먹으면 되지’ 라며 해맑게 말씀하신다. 시어머니는 내 앞에서 이모를 타박할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런 대꾸를 안 하지만 나는 속이 후련해졌다.


그렇게 오늘 생일을 앞두고, 매일 집에 오시는 요양 보호사님에게 흰쌀밥을 지으라고 하신다. 보호사님이 웬일로 흰밥을 드시냐고 의아해하시지만, 나는 그 속을 안다. 먹을 거에 대해서만은 항상 선수 치기 좋아하시는 시어머니가 지금 자신의 생일을 미리 축하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온갖 잡곡, 콩을 너무 많이 사놔서 뒷 베란다에 한 가득인데, 금요일 생신을 맞아 월요일부터 흰쌀밥을 먹겠다고 하시는 거다.


요즘은 시어머니랑 같이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내가 결혼하면서부터 내내 모시고 살았다고 하면 다들 놀랜다. 뭐 그래도 살 만했다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고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그냥 입 닫고 눈 막고 살기로 마음먹었고, 잘하고 싶은 생각도 버리고 사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덕분에 오랜 기간 회사에서 안 잘리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얻었고, 퇴직 한 지금은 이런저런 취미 생활을 찾아 헤매는 적극성도 얻었다. 속상할 때마다 일기장 가득 넋두리를 쓰다 보니 어느새 글 쓰기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 기승전결 논리 있는 말솜씨로 더 이상의 억지를 허용하지 않는 기술도 늘었으며, 집 밖으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다이어트까지 저절로 됐다는 것이 이득이라면 이득일 것이다.



내가 글을 쓰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시어머니 일은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친구들에게 수다로나 풀 일이지 나도 굳이 글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 흰쌀밥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맘 구석 숨겨놓은 화가 스르르 올라온다.


나는 나만을 위한 까만 흑미찹쌀을 정성스레 씻어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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