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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Jan 28. 2021

[15일] 수어를 배우며

수화가 아니라 이젠 ‘수어’다



‘수화’의 추억

대학시절, <수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다. 언어, 비언어를 포함해 사람들의 다양한 소통방식이 궁금할 때였다. 게다가 비싼 수업료를 내고 있으니 웬만하면 듣고 싶은 과목들을 선택하자 해서 택한 교양과목 중의 하나가 ‘수화’였다. 교양과목들은 보통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선택되곤 했는데, 많은 이들은 공공연하게 점수를 잘 준다고 소문난 <인삼의 이해>를 들었다.  


인삼보다 점수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은 좋은 점수를 받는 데 성공했고, 나는 교양수업에서 C+을 받아야 했다. 교양과목에 수화동아리 학생들이 대거 수업을 들었던 것이다. 벼락치기나 단기간의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언어임을 절실히 깨닫고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 갔다. 배운 단어들은 대부분 잊었고, 자음과 모음을 쓸 줄 아는 것만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친구들의 이름을 수화로 표현해 주거나 하는 게 대학시절 배운 수화 사용의 전부였다.      


작은 동그라미의 벽

늘 TV 화면 아래 작은 동그라미는 수어 통역사의 자리였다. 작년 코로나 19부터는 수어 통역사가 정책브리핑 당국자의 옆에 나란히 서기 시작했다. 작은 화면의 벽을 허물고 나온 자리를 보며, 다시 수어를 떠올리게 됐다. 한 자 한 자를 다시 손으로 그려본다. 비록 가나다라마바사.. 이렇게 밖에 못써보지만, 조금 더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움찔거렸다.      


유튜브를 찾다가 수어를 가르치는 '유손생님'을 알게 됐다. 물론 ‘수화’로 검색을 했었다. 수어로 바뀐 것을 그간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화’가 아닌 ‘어’로 바뀐 건 큰 차이였다. 단지 수화가 농인들의 ‘말’이 아니라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임을, 법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2016년 2월에서야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됐고, 그해 8월부터 시행됐다는 건 오늘에서야 안 일이다. 왜 이곳저곳에서 수화가 아닌, 수어라고 칭하는지 그제야 알게 됐다. 작은 공간을 허물고 나온 건 수어 통역사뿐 아니라, 한 언어로 인정받은 농인들의 말이었다.      

Youtube  <유손생>

영상을 켜고 기초 자기소개부터 배웠다. 손가락 하나, 손의 회전 방향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지니 손동작을 주의 깊게 익혀야 했다. 수어의 문법도 일반 국어의 문법과 달라서 익숙해지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급히 배워서 다시 잊어버리지 말고, 조금씩만 배워서 제대로 익혀보자 생각했다.      


오늘 처음 알게 된 건 ‘비수지신호’였다. 수어는 손동작을 바삐 움직여 단어만 많이 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동작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의사표현 방식이 ‘비수지신호’ 이다. 비수지신호는 손이 아닌 얼굴의 표정, 머리 움직임으로 단어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정책브리핑 당국자 옆에 서 있는 수어 통역사들의 표정을 볼 때마다 표정이 다양하고 액션이 풍부하다 생각했는데, 그것 또한 통역의 일부였던 것이다.     

 

유튜브 선생님 또한 청각장애인을 부모로 둔 분이었다. 이런 분들을 ‘Children Of Deaf Adults'의 앞자리를 따서 ‘코다(CODA)’라고 부른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이들은 소리와 침묵의 세계를 하루에도 여러 번 오간다. 부모의 육아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진다. 수어로 옹알이를 한 일화나 아이에게 수어로 동화책을 읽어주며 육아를 한 부모의 이야기를 보았다. 아이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하는 부모의 표정에서 다름을 느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침묵과 고요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표정이, 자식 이야기에 자랑스러워하고 행복해하는 여느 부모와 부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연민의 시선'이나 '장애를 극복해낸 서사'가 아니었다. 그저 우리처럼 일상을 살아가며 겪은 반짝이는 이야기들이었다. 수어의 기초 단어를 하나하나 배운 것보다 마음의 귀를 조금 열었다는 게 더 큰 배움으로 남은 하루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시도들이 조금씩 이어진다면 여전히 편견의 시선도 조금씩 더 많이 허물어질 수 있지 않을까. 좁은 동그라미의 벽을 넘어서 한 언어로 존재하게 된 '수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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