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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Jan 29. 2021

[16일] 필사를 해봅니다

느리게 '읽기' 연습

필사(筆寫). '베껴 쓰는 일'이다. 베껴 쓰는 일을 자주 했던 건 주로 고등학교 시험기간에서였다. 빈 종이에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 시험에 나올 내용을 빽빽하게 따라 썼다. 몇 번씩 쓰고 나서야 그 단어들이 머리에 잠깐 머물다 스쳐갔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머리에 있던 내용들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교과서의 문장들이 내 것이 되었을 리 만무하다. 답들 조차도 기억이 안나는 걸 보면 그렇다. ‘비효율의 집합체’. 당시 시험 범위의 내용을 억지로 밀어 넣기 위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베껴 쓰면서 든 생각이었다. 벼락치기 준비로 바쁜 와중에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필기구는 금세 닳아버렸다. 손가락엔 굳은살이 남았다. 글씨라도 예쁘면 그 맛에 쓸 텐데, 아무리 천천히 써도 글씨는 점점 더 악필이 되어간다.    

  

요즈음 책을 읽고 나면 금방 휘발되어 버리는 것 같아, 사진을 찍어서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 놓거나 컴퓨터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기자셨던 선임은 필사를 추천했다. 직접 손으로 필사를 하면 글 쓰기에도 도움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베껴 쓰는 것일까. 타이핑이 잘 되는 시대에, 데이터를 직접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 필사는 시간과 필기구 낭비 아닐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직접 펜을 들고 노트에 한 자 한 자 필사를 한다. 손으로 직접 쓰는 필사에는 컴퓨터의 타이핑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 있을까.


회사에서 받은 다이어리를 필사 노트 삼아, 최근 읽은 김애란 작가의 <잊기 좋은 이름>을 펼쳤다. 문장이 좋아서 다 옮겨적고 싶다. 노트의 양에 한계가 있으므로 딱 몇 문장만 고른다. 그러려면 접어놓은 페이지들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한다. 그러다 마음이 가는 문장에 멈춰 선다. 이 구절이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필사를 한 다는 것도, 그 문장에 잠시 살다 오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읽기는 어쩔 수 없이 빈틈이 생길 수 있다. 작가가 문장을 어떤 흐름으로 가져가고, 어떻게 쌓아갔는지 알려면 문장을 아주 천천히 살피거나 여러 번 보아야 하는데 눈으로만 쫓아가면 쉽게 놓칠 수 있다. 필사는 그럴 수 없다. 작가가 쌓아놓은 생각의 과정을 그대로 다시 쓰면서 작가의 시선에서 보고, 멈추어 서서 생각하는 ‘머묾’이 필사의 힘이지 않을까.    

  

컴퓨터 타자도 ‘베껴쓰기’는 맞다. 하지만 눈과 손의 속도가 비슷하다 보면, 생기는 문제가 있다. 바로, 머물지 못하는 것이다. 오래전 고모의 일을 돕느라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며칠 한 적이 있다. 문장을 그대로 한글파일에 옮겨 적는 건데, 며칠간 많은 페이지를 타이핑했지만 남은 기억이 없다. 그렇게 옮겨 적는 건 단순 ‘타자연습’에 불과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손쉽게 데이터를 찾을 수 있는 기능은, 역으로 손쉽게 기억을 기기에 위임하는 모양새가 됐다. 스마트폰에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면서, 가까운 사람들의 번호마저 기억을 못 하는 요즘이다. 컴퓨터에 베껴 적기를 하고, 언제든 찾아볼 수 있다는 마음 하나로, ‘적어두는’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고 마음에 새길 시간은 정작 충분히 마련해 두지는 않았던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필사를 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문장에도 조금 더 오래 머물다 갈 수 있게 됐다. 필사를 하면서 내 생각을 밑 줄에 적어놓는다. 손이 가는 대로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다. 마음에 드는 문장은 형광색으로 칠해둔다.


결국, 느리게 읽기 위해서 필사를 하고 있었다. 미식가가 된 것처럼, 음식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천천히 음미하듯 정성스레 한 땀 한 땀 쓰고 문장을 꼭꼭 씹다 보면, 글 맛이 조금 더 제대로 다가오지 않을까. 단어 하나, 띄어쓰기 하나를 직접 내 손으로 천천히 곱씹으며 쓰다 보면, 문장의 길이와 리듬감, 문맥의 분위기를 조금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듯하다.      


누군가 필사를 가장 느린 독서라고 한다. 작가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과정을 빠르게 소화해내기란 애초부터 불가했을지 모른다. 필사를 많이 한다고 좋은 글쓰기가 저절로 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맛이 있는 글, 좋은 글이 손 끝에, 머리에, 마음에 조금씩 새겨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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