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짓지 않고 가다가다 보면
4월의 봄. 제주는 언제 가도 좋지만 특히나 유채꽃이 흐드러진 봄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제주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 우연히 4월에 제주에서 열리는 트레일러닝 대회 소식을 알게 됐다.
갑자기 에너지가 솟아올랐다. 여행과 마라톤 대회라니! 둘 중 어떤 이유로 먼저 제주를 택한 건지 헷갈렸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달리는 첫 대회다. 그것만으로 색다른 일일 테니, 부푼 마음으로 제주행 짐을 쌌다.
걱정인 건, 트레일러닝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거였다. 정보가 별로 없었다. 가끔 SNS에서 트레일 러닝 조끼와 좋은 트레일 러닝화를 신고 산을 내달리는 분들의 즐거운 표정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간접 체험을 했을 뿐이었다. 집에는 러닝화밖에 없었다. 등산화도 없었다.
"트레일러닝 10km인데, 뭐 어때. 제주는 대부분 오름이니까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대회에서는 안전이 최우선이다. 일반 러닝화보다는 접지력이 좋은 트레일 러닝화를 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착한 가격에 나온 트레일 러닝화를 급히 주문했다. 장비를 마련하고 나니 대회와 여행의 설렘이 함께 밀려들어왔다. 제주에 도착했다.
대회장에 들어서니 노란 유채꽃이 가득했다. 유채꽃 관광지로도 유명한 곳에서 트레일 러닝 대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대회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트레일 러닝복을 잘 갖춰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날씨는 유채꽃처럼 화창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앞으로 갈 10km 코스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유채꽃밭의 한가운데에 나있는 좁은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장 울타리가 나왔다. 목장 나무 울타리를 넘었다. 누군가는 뛰어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몸을 뉘어 울타리 사이를 빠져나왔다. 색다른 지형지물 덕에 달리는 재미가 더해졌다. 이어서 얕은 개울가가 나오고, 숲길이 보였다. 금세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들에 앞으로의 길들이 더 기대가 됐다.
100km 대회에 참가 중인 러너들을 여럿 마주쳤다. 이미 며칠간의 달리기를 끝내고 피니시라인을 향해 돌아오는 길이었다. 며칠을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씩 쉬지 않고 내달려서 분명 피곤할 텐데, 마주한 표정은 달랐다. 밝게 웃으며 맞은편에서 파이팅! 을 외쳐주셨다. 다리에 힘이 좀 더 실렸다. 응원의 힘은 언제나 크다.
숲길을 헤쳐나가자 거대한 오름이 눈앞에 나타났다. 제주의 오름이 거대하게 느껴지는 건 경사 때문이었다. 산책이었으면 모르겠지만 달릴 때는 조금 달랐다. 조금 달렸을 뿐인데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뛰었다가 조금 걸었다가 하면서 멈추지 않고 갔다.
대회에 참가한 몇몇 이들은 오름에 올라 펼쳐진 제주의 풍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대회를 그야말로 여행처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제주의 풍경을 눈으로만 담기로 하고, 남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어서 계단이 나타났다. 이어지는 경사를 계속 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계단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올랐다. 평지에서의 10km와는 체감이 달랐다. 평지였다면 하프마라톤에서 15km 정도는 지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달리다 보면 처음의 생각과는 많은 것이 달라진다. 처음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더라도, 자연 앞에서는 다시 겸허해진다. 어떤 코스가 눈앞에 펼쳐질지 기대됐던 처음의 마음과 달리, 슬슬 걱정이 됐다. 나머지 코스들은 내리막길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져만 갔다. 7km 정도 지점에서, 자갈길이 나타났다. 경사가 아닌 게 감사할 일이었지만, 아무 그늘 없이 내리쬐는 햇볕에 무방비로 뛰어야 했던 자갈길은 잘 달궈진 고깃집 불판 같았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익어가며 남은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대회 운영진이 배번을 적어갔다. 그때까지는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물도, 별다른 에너지 젤도 챙기지 않고 뛰기 시작한 걸 후회하고 있을 무렵, 급수대를 발견했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남은 힘을 짜내 뛰어갔다. 물한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남은 길을 달렸다. 다른 대회와 달리 경치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경치가, 날씨가 환상적이었다. 8~9km쯤 가니 언젠가부터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속력을 내보기로 했다. 1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반환점을 돌아 유채꽃이 흐드러진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자연을 마음껏 내달리고 나니, 성취감이 차올랐다. 돌하르방 메달을 목에 걸고, 나머지 제주 일정을 즐기기 위해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남은 제주 여행은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많은 에너지를 썼기 때문에 몸이 쉬라는 소리였겠다.
제주를 즐길 생각에 부랴부랴 대회장을 빠져나왔는데, 대회에서 여자 3위를 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내가 입상이라니? 이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알게 된 터라 수상자로 무대에 직접 오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대회장에서는 몇 주 뒤에 커다란 돌하르방 트로피와 등산 백팩을 선물로 보내줬다.
극한이라고 생각하는 지점들을 얼마간 버티면서 달릴 수 있구나 생각한 건 이번 대회(여행)의 작은 수확이었다. 때때로 멈추지 않고 계속 가다 보면 삶은 예상치 않은 수확을 가져다준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소중히 앞으로 가다 보면 운 좋게 내 것이 아니라 믿었던 무대 위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날 도 있을 것이다.
처음 트레일 러닝 대회를 뛰어보면서, 그리고 내 것이 아닐 것 같았던 트로피를 들고 나서 미리 한계를 짓지 않기로 했다. 한계 없이 달리다 보면 생각보다 꽤 빨리, 꽤 멀리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피니시 라인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