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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끄적 Sep 14. 2023

슬픈 과거

The past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전지적 심중위 시점'

'심중위 관점에서 바라보는 좌충우돌 군대이야기'



-지난 줄거리-

장교가 되기 위한 훈련 중이다. 사고뭉치 쌍벽을 이루는 같은 내무실 호열이와 즐거운 초급장교 교육을 즐기고 있다. 밤에 몰래 마시는 소주가 일품. 우리 둘은 그렇게 취중진담을 하고 있다.


 

The past


"아빠? 아버지??"

"엄마? 엄마??"

"아빠. 엄마"

"거기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나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강원도로 여행을 가던 우리 가족이 타고 있던 승용차가 전복되었다. 몇 바퀴를 구른 건지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눈을 떴을 때 희미하게 아빠와 엄마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운전대를 꼭 붙들고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고, 엄마는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두 분 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얼마나 불러댔는지 나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불행히도 뒷좌석에 타고 있던 나만 눈을 뜨고 있었다. 우리 승용차는 앞에서 무섭게 달려오는 덤프트럭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했다. 일방통행도 아니었는데 덤프트럭은 미친 듯이 우리를 향했다. 다급한 아버지의 목소리 "어? 어?"만 들었을 뿐 눈떠보니 이렇다.


이런 비극적인 꿈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꿈이길 바랐다. 볼에서 피가 날 정도로 꼬집어봐도 아프기만 했다. 진짜였다. 산비탈길 나무에 걸린 우리 승용차는 잠시 후 경찰차와 119차의 출동으로 구조되었다. 나는 중3 겨울방학 그렇게 고아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검사였다. 차기 검찰총장에 거른 될 정도로 촉망받던 검사 중에 검사. 대단한 사람이었다. 주위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집에서보다 뉴스나 신문을 통해서 더 많이 봐왔었다.


바쁘신 아버지는 국가의 몸이라고 생각했고, 검사를 천직으로 여기셨다. 가족보다는 항상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한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어렸을 때에는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었다. 하지만 마음 따뜻한 아버지는 내가 커갈수록 나의 우상이었으며,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도 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강남학군에서 교육을 받으며 총성 없는 전쟁터 속에서 자라왔다. 이 세상 모든 학생들은 전부다 나같이 학교 학원 과외 집을 뺑뺑이 돌며 살아가야 되는 줄로만 알았다. 공부도 곧잘 해서 서울법대를 목표로 했었다. 적어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다행히도 나에게는 외할머니가 살아계셨다. 충청도 한적한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니댁은 내가 방학 때마다 놀러 가던 곳이다. 유일한 외손주였던 나는 외할머니가 매우 예뻐하셨다. 갈 곳이 없었다. 아버지가 모아둔 재산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우리가 살고 있던 집도 강제집행이 되었고, 남은 거라곤 내가 공부하던 책과 옷가지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분이 어느 날 조용히 나의 짐을 챙겨서 나를 외할머니댁에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나는 충청도에 내려왔다.


아버지에 대한 뉴스기사들이 한동안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는 기사들, 정치적 음모론이라는 둥,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살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계획에 의한 자살로 결론이 내려졌다.


아버지 친구분은 내게 "너도 크면 알게 될 거야." 한마디 말과 함께 큰 박스를 하나 주고 떠나셨다. 박스를 열어보았다. 세종대왕이 그려진 돈이었다. 쳐다도 안 보고 외할머니께 드렸다. 외할머니가 세어봤는데 만 원짜리 300묶음이라고 한다.


한동안 교통사고 악몽에 시달렸다. 가끔은 실성한 미친놈처럼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밥도 안 먹고 해가 떴을 때부터 멍하니 먼산을 바라보다 보면 할머니가 저녁을 먹으라고 한다. 마치 기억상실증이라도 온 것처럼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었다.


병원에 갔더니 쇼크로 인한 부분 기억상실증과 우울증이 온 것 같다고 한다. 약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단다. 약은 왜 이리 많은지 약만 먹어도 배부르다.


중3 겨울방학이 끝나고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학교를 다녀서 뭐 하나 싶어 입학을 거부했지만 울며 사정하는 불쌍한 할머니의 소원이라길래 들어주기로 했다. 입학첫날 교장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우리 학교도 이게 얼마만인지 서울대 입학생이 나오겠어요. 호호호"

"백호군 믿어봅시다."

문 앞에서 누군가 이야기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 뚱뚱한 안경 쓴 할아버지가 나를 반긴다.


"오, 왔구나 백호야. 이리 앉아 앉아."

"그래. 몸은 괜찮고? 이제 마음 굳게 먹고 공부해야지?"

"백호 네가 우리 학교 희망이다. 호호호"

"서울에서 내려왔으니 다시 올라가야지? 서울대로. 호호호"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누구 마음대로 어딜 간담. 요즘 나는 말을 잘 안 한다. 벙어리냐는 소리도 듣는다. 입학 첫날부터 나에 대한 소문은 벌써 전교생까지 다 퍼지게 되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모든 아이들이 나를 쳐다본다. 텃세 부리는 놈들이 많이 있었다. 첫날부터 일진인지 양아치인지로 보이는 패거리 다섯 명이 나를 부른다.

"야, 끝나고 남아라."


끝나고 소각장으로 따라갔다.

"야. 야. 서울물 좀 먹었냐?"

"너네 아버지는 왜 자살했냐?" (패거리들 키득키득)

"담배 좀 사 와봐라. 퉤"


내 신발에 침을 뱉었다. 지금껏 싸움 한번 제대로 한적 없었던 나인데. 애써 지우려던 아버지를 두고 비아냥거리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반응했다. 정말 죽도록 때렸다. 아니 죽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사정없이 주먹은 그놈을 향했다.


패거리들이 그놈에게서 나를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놈은 얼굴에 피범벅이 되었다.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안 죽었다. 나는 던져놨던 가방에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백: "누가 됐든 건들면 다 죽인다."


그런 말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꼭지가 도니 나도 모르는 내가 되었다. 그 말은 지금 생각해도 쫌 멋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싸움꾼이 되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에도 이상하게 싸울 일이 생겼다.


중요한 건 싸울 때마다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그리고 더 웃긴 건 매번 내가 이긴다는 사실이다. 무슨 영화 속 주인공처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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