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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피레네의 오리 손 알베르게

(5분 안에 해야 하는 샤워)

by 구슬 옥

8월 21일 피레네 오리 손 알베르게 8km

책에는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 초입의 오리 손 산장까지 7~8km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거기를 지나면 20km를 걸을 때까지 bar나 알베르게가 없기 때문에 마실 물을 특히 많이 준비해서 가라고 강조한다. 어제 순례자 사무실 봉사자들이 여러 번 우리에게 신신당부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가끔 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탈수로 쓰러지기도 하는 일이 있어 특히 더 강조하는 것 같다. 자기네들의 얘기를 이해하고 있는지 아닌지 못 미더워하면서 되풀이해서 말하던 봉사자들의 진지한 얼굴이 꿈속에서도 보인 듯하다.


어제 일찍 잠든 탓에 새벽 4시에 눈을 뜨고 6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8인용 도미토리 방의 침대가 빈 곳이 없고, 아직 모두들 잠들어 있어 일어나 부석거릴 수가 없다. 남편은 답답한지 잠깐 나갔다가 현관문이 열려 있다며 닫고 들어왔다.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남편에게 6시까지 기다리는 건 고문이다. 나도 힘든 걸 보면.

6시 무렵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하면서 도미토리 방의 모든 식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방에는 5시 이전부터 움직이고 나가는 소리가 나는데 우리 방 사람들은 오늘 어느 쪽으로 피레네를 넘을 것인지 여유 만만이다.


적어도 27km면 7시간 이상 걸릴 것이고 (젊은 사람, 잘 걷는 사람 기준) 적어도 1~2시 사이에 도착하려면 6시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다들 여유롭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피레네를 오르는 것은 아름다울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오늘 7~8km 가서 오리 손 알베르게에 머무를 것이라 새벽 일찍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3시간 적어도 4시간 안에는 갈 테니까. 그러나 뜨거운 햇빛 속을 걷느니 아침 일찍 해 뜨는 것을 보면서 시원할 때 걷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섰다.


순례자 사무실을 지나는데 순례자 여권(이것이 있어야 알베르게에서 잠을 잘 수 있고 산티아고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서 순례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문 열리기를 기다리고 서 있다. 아마 어젯밤 늦게 도착해서 못 받은 거 같다.

넉살 좋은 남편 따라 올라! 부엔 까미노! 를 외치며 어제 봉사자가 알려준 길을 죽~ 신경 쓰며 걸었다. 중간에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 못하고 오리 손과 발카 로스로(2015년에 왔을 때는 이 쪽 길을 택했었다) 나눠지는 길에서 어제저녁 가게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부엔 까미노!'를 외치고 헤어져 오리 손으로 가는 오르막을 오른다.


차도로 된 오르막이라고, 천천히 잘 보고 가라고 열심히 지도를 설명해 주던 봉사자가 생각난다. 영어를 알아듣고 있는지 걱정하는 모습으로 여러 번 설명하던 친절한 봉사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며 계속된 오르막을 오른다. 아직 배낭의 무게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기분 좋은 상태로 가볍게 천천히 올랐다.

피레네산을 오르며 경사진 산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 떼들-리더의 귀에 달린 종소리를 듣고 소들이 함께 움직인다

우리보다 젊은 남녀들, 젊은이들, 나보다 나이가 더 있지 않을까 싶은 젊은 할머니까지 모두들 유쾌하게 웃음 띤 얼굴로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지팡이 든 손을 들어 보인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왔다고 하는 할머니 한분이 우리 보고 어디서 왔냐고, 까미노는 끝까지 다 걷느냐 등등 호기심 가득 물어본다.


이때다 싶어 우리도 한국에서 왔고, 루르드 성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산티아고데 콤포스텔라-피스니테레-묵시아-살라망카-아빌라-파티마 성지-포르투갈 리스본-한국으로 이렇게 2달 여행할 거라고 하니 '굿~'한다.


또 오르막을 오르다가 이태리 아가씨를 만났다. 서른 살이라고 소개하는 그녀에게 남편은 60살이라고 하니까 그녀는 믿을 수 없다고, 40대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그녀가 피부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남편이 김치 먹어서 그렇다고, 코리안 베지터블이라고 하며 엄지 척을 했다.


유쾌한 아가씨와 함께 사진도 찍고, 아가씨는 오늘 롱 세스 바에스 까지 27km를 걸어야 해서 먼저 보내면서 갖고 있던 귤을 하나 주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부엔 까미노!


우리도 오리 손까지 이어지는 경사진 오르막을 오르다 어제 생장행 기차에서 만났던 이태리 아저씨를 만났다. 본인은 친구 바래다주고 내려간다고 하면서, 한국 남자 이 모씨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코리안 이라고만 하고 영어 잘 못한다고 말을 안 한다며 서운 한 듯 말한다.


넉살 좋은 그 이태리 남자가 내려가는 승용차를 세워 함께 가자고 하니 태워준다. 집으로 가는지 아니면 버스 타고 롱 세스 바에스로 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걷다 보면 또 만나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손을 들어 작별했다.

유럽인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가 동양인이라 호기심이 많은 건지, 특별한 곳에서의 만남이라 그런 건지 알쏭달쏭하다.


걷는 동안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올라가다 보니 봉사자가 설명한 대로 경사가 거의 40도 이상은 될듯한 오르막이 시작되고 드디어 오리 손 Refuge(산장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피레 내 산맥의 초입에 있는 산장 알베르게'

가게를 겸하고 있어서 피레네 주변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시원한 맥주 한잔, 파인애플 주스, 피자처럼 생긴 빵 한 조각까지 10유로 결제하고 더위도 갈증도 날리며 먹었다.


알베르게에 먼저 짐을 풀고자 했지만 어제 오후에 예약한 거라 1시에 들어갈 수 있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탁 트인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기다리다 들어간 알베르게는 10명 잘 수 있게 이층 침대가 다섯이나 들어있다.


아직 우리밖에 없어 침대정리하고 부지런히 샤워했다. 특이한 것은 샤워 시작할 때 코인을 넣어야 물이 나오는데 5분이면 끝이니까 알아서 샤워 잘하라고 한다.


알베르게에서 샤워할 때 코인 넣고 5분만 물 나온다고 하는 것도 정말 처음이고 특이하다. 비용도 저렴하지 않은데 까미노 순례자에게 조금은 야박하다. 그렇지만 신경 써서 샤워하니 5분은 안 걸려서 샤워가 끝난다.


운영해 본 결과 찾은 묘안으로 이렇게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마다 천태만상으로 물 쓰는 습관이 다르니 100% 이해했다.


덕분에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빨래해서 햇볕 좋은 피레네 산맥 중턱의 정겨운 빨랫줄에 죽~ 널어놓으니 볼만했다. 뜨거운 햇살에, 바람에, 빨래는 금방 마를 것이다. 다른 순례자들이 들어와 샤워하고 빨래할 때까지는.

경비 쓴 거 정리하고 한잠 자려는데 그때 막 도착한 순례자 일행 3명이 들어왔다. 우리는 일행이 편하게 샤워하라고 카페에 올라가 맥주 한잔씩을 먹었다.


피레네 산맥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면서 더 앉아있고 싶었지만, 자동차로 피레네를 올라와 식구들과 식사하면서 담배를 수시로 피워대는 프랑스인들 때문에 반대편 언덕의 알베르게 파라솔로 나갔다.


그런데 나는 유모차에 아이를 앉혀 놓고 그 앞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프랑스 엄마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문화적 차이인지...


위쪽 알베르게에 묵는 사람들은 전부 외국인들이고 자기들끼리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코리안은 우리 부부뿐이고, 영어가 짧은 우리는 필요 없이 그들과 수다 떨 생각이 없다. 영어가 유창했으면 한 수다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해외여행을 하려면 아무래도 숙련된 회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몇 년 전에는 가족이 4명 함께 와서 그런지 관심 있게 말 거는 외국인들이 많지 않아서 영어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이번에는 부부 둘이 오니 알은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질문도 많다. 알아들은 것을 쉽게 말해야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그럭저럭 들리기는 하니 다행이다. Dinner시간을 기다리며 그들의 수다를 지켜보면서 간간이 글을 쓴다. 카페에서 본 꼬마(여기 꼬마들은 인형같이 예쁘다)가 조그만 도마뱀을 집으려 하니 도마뱀이 날쌔게 달아난다.


이게 정말 도마뱀인가 할 정도로 너무도 작은 까만 도마뱀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하늘 위에는 솔개가 먹이를 찾는지 계속 맴을 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 위에서.

오리 손 알베르게에서 묵는 순례자들이 저녁을 함께 먹으며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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