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도 느끼는 애틋한 정)
9월 18일 아스또르가(Astorga) 16.5km
오늘은 아스또르가에서 묵을 예정이라 독일 청년들처럼 새벽 일찍 출발할 필요는 없었다. 평소와 같이 기도하고 7시 30분쯤 알베르게를 나와 Bar에서 가볍게 아침을 먹고 까미노 표시를 따라 계속된 편평한 오르막길을 걸었다. 때론 시멘트길이 숲과 이어져 있기도 하고 옆의 도로를 따라 굵은 모래가 많은 흙길을 걷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현지인 아저씨기 커다란 개를 데리고 우리 앞을 지나가시는데 줄을 매지 않아 잠시 움찔했었다. 그래도 아저씨가 손짓을 하거나 짧게 뭐라고 얘기를 하니 큰 개가 주인 곁에 딱 붙어가서 안심이 되었다. 까미노를 걷는 동안 몇 번 큰 개들과 길에서 마주쳤는데 다행히 주인이 함께 있어서 그런지 우리들에게 크게 겁을 주지는 않았다.
한 번은 사하군을 향해 오르막인 숲길을 걸어가는데 검은 큰 개 한 마리가 계속 우리를 따라와 긴장하면서 걸었었다. 우리 외에는 근처에 걷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 더욱 긴장했었다. 그런데 가다 보니 우리를 해 할 것 같지는 않고 그 검은 개도 누군가를 찾아 계속 두리번거리며 까미노 길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멀리 앞서서 까미노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따라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겁이 나서 그 검은 개 앞으로는 못 걷고 뒤에 조금 처져서 걸었는데 사하군 마을 초입의 성당 근처로 들어서면서 개가 뛰어가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한국의 남녀 청년들에게 가서 꼬리를 흔들며 소리를 냈다.
청년들이 놀라며 검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안아 주면서 '여기까지 오면 안 돼~ 우리가 떠나서 서운했구나~' 하면서 계속 검은 개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청년들이 검은 개에게 주인이 찾을 테니 돌아가라고 쓰다듬으면서 자신들도 뒤로 다시 걸어가면서 검은 개를 보내니 아쉬운 듯 뒤 돌아보면서도 검은 개는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
아마 청년들이 식사하고 쉬었던 Bar에서 키우는 개였는데 잠깐 사이인데도 청년들과 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매일같이 왔다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검은 개도 함께 떠나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무서웠던 마음이 동물이지만 정을 느끼고 꽤 먼 거리를 찾아왔다가 작별하고 또 순순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마음을 짠하게 한다.
우리는 중간에 까미노 표시를 놓쳐서 살짝 길을 헤맸는데 마을에 사는 주민이 우리가 가려는 길의 반대쪽으로 가라고 알려줘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속 도로 옆길로 시멘트길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있어 아무래도 이 길은 지난번 우리가 걸은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니 남편이 일갈에 '그럴 리 없어 주민이 알려주는 길이니 맞을 거야' 한다.
나는 계속되는 소음과 오르막길에서 지난번 걸으며 보았던 자작나무 군락지를 찾아보았지만 우리가 언덕 정상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아스트로가를 바라볼 때까지 찾지 못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뒤에서 '안녕하세요?' 하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광운대 교수로 까미노 길을 10번째 왔다는 40대 후반의 한국 남성이었다.
그분도 다시 걸으면서 길을 헤맸고 우리가 걸어온 길로 오게 되었다고 올 때마다 길을 걷는 게 조금씩 바뀐다고 말한다. 체력도 그전과 같지 않아 조금 힘들다고 하면서 본인은 아스또르가에서 쉬지 않고 그다음 마을에서 쉴 것이라고 했다.
돌 십자가 밑에 앉아 기타를 치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저쪽 숲길에서 순례자들이 계속 올라왔다. 그 사람들을 보니 그 길은 우리가 걸어온 길 보다 차도를 피해 조금 우회해서 걸어야 했던 것 같았다. 아쉬워하는 나를 위로하듯 그 교수는 돌 십자가 앞에서 남편과 나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그와 우리는 함께 아스또르가로 접어드는 복잡한 길을 걷다가 마을 근처 Bar에서 시원한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먹고, 다시 차도를 지나 오르막 언덕에 넓게 펼쳐져 있는, 중세의 시간들이 남아있는 마을로 들어갔다.
아스또르가 마을의 시립 알베르게 앞에서 아쉬움에 사진을 함께 찍고 그는 아스또르가를 조금 돌아보고 다음 마을로 들어간다며 계속 걸어갔다. 천년의 길인 순례길에서 우연히 까미노를 십여 차례 걷고 있는 분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서로 건강하게 잘 걷고 돌아가기를 축복하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오늘 들어가는 알베르게도 150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인데 그곳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만남이 기다릴지 기대가 된다.
우리는 시내의 큰 슈퍼마켓에서 사 온 먹거리로 음식을 만들어, 혼자 까미노를 걷고 있다는 한국 청년과 같은 테이블에서 먹게 되었다. 청년은 돼지고기 삼겹살을 사다가 구워서 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큰 도시의 슈퍼마켓을 가니 입맛이 당겼다고 했다.
또 딸하고 같이 걷고 있다고 하는 강화에서 오신 남자분과 와인을 함께 마셨는데 아무래도 딸이 발을 다쳤는지 걷지를 못해서 바로 산티아고로 들어갔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거 같다는 얘기를 했다. 몸이 가벼운 젊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코스를 길게 잡아 걷다가 발에 문제가 생겨 걷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빠가 함께 오셨지만 그것만은 도와줄 수가 없으셨던 것 같다. 이렇게 돌아간다면 아마도 많이 아쉬울 것 같다. 갑자기 지난번 사하군에서 만났던 청년은 지금도 걷고 있는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갔는지 궁금해졌다.
식당이 있는 아래층 주방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정경은, 언제라도 또 바라보고 싶은 풍경이라, 와인잔을 기울이며 모르던 사람들과도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식사를 마치고 주방을 정리한 뒤에 우리는 알베르게 앞에 있는 잘 관리된 공원을 산책하고 스페인이 자랑하는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주교 궁을 보러 갔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관람표를 내고 들어가 소장하고 있는 오래된 유물들과 가우디의 색깔이 드러나는 건축물을 감상했다.
외부는 레온에서 보았던 가우디의 건축물 '까사 데 보띠네스'처럼 원기둥 위의 고깔모자 형의 지붕과 귀여운 동화의 집 같은 모습이다. 내부 역시 천장 아치나 기둥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작은 창문들의 세밀하고도 우아한,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석관들이 많이 보존되고 있었는데 500여 년이 지난 석관들도 있었다. 그리고 주교 궁 마당에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의 청동으로 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성당의 문들이 모두 닫혀있어 서운한 맘으로 밖에서만 한참을 바라보다 알베르게 근처로 돌아왔다. 오후 9시가 다 되어가도 별로 어두워지질 않는 이곳에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고, 언덕 아래 집들에 도 하나둘 불이 켜지는 걸 오래된 돌담 위에 앉아 지켜보다가 알베르게로 들어와 마른빨래를 걷고 내일의 까미노를 걷기 위해 휴식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