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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남편 김광석 Oct 04. 2016

이 영화는 '명확한 해피엔딩'이다

아수라(Asura : The City of Madness, 2016)

영화 <아수라(Asura : The City of Madness, 2016)을 보고 작성한 비평문입니다. 글의 줄거리가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글의 전반적인 내용이 영화의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독자분들은 지금 바로 '뒤로가기'를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애초에 '아수라'나 '수라도(지옥도)'는 없었다

  이미 수많은 후기에서 정리된 부분이지만, 누군가는 이 글이 처음일 테니 중요한 키워드인 '수라도(지옥도)'와 '아수라'를 짧게 설명하며 글을 열겠다.


  위에 표기법이 보여주듯 수라도와 지옥도는 결국 같은 말이다. 그 뜻 또한 보이는 대로 싸움, 광기, 피, 분노 등 인간의 악한 감정이 뒤엉켜 있는 세상, 말 그대로 '지옥'이다. '아수라'는 그곳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신이며,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신이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신이다. 즉 수라도는 지옥이요, 아수라는 악마들의 왕인 셈이다.


수라도로 내려온 아수라를 닮은 듯한 도경(정우성) / 출처 : 다음 영화(movie.daum.net)


  이 단어들을 설명하는 이유는 많은 홍보 글과 리뷰에서 이 영화를 '악인들이 그리는 극악의 지옥도'라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짙은 피비린로 가득찬 분위기 제목의 영향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묘사를 듣고 영화를 본 이들은 이 영화에 실망할 확률이 높다. "지옥도를 그린다"라고 적혀 있는 홍보문구에 비하면 영화 <아수라>의 잔인함은 <올드보이, 2003. 박찬욱>, <악마를 보았다, 2010, 김지운>, <아저씨, 2010, 이정범> 등이 보여주는 경악스러운 잔인함에  '평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연급 중 가장 강한 캐릭터인 '계장'마저도 아트박스 주인 '마동석'이나 끝까지 가는 '조진웅'의 카리스마에 비하면 '빈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을 옭아매는 모습이 점점 잔인해져서 '극'에 달하는 순간에도 '푸흡'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런 웃음이 지속되니, (모든 관객에게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이 영화가 웃겨? 사이코패스 아니야?"라고 불쾌함을 표현하는 이도 등장했다. 이들의 엇갈린 감정에서 나는 누군가는 이 영화를 '희극'으로 보고, 누군가는 '비극'으로 보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다음의 질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웃는 박성배와 화내는 박성배 / 출처 : 다음 영화(movie.daum.net)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느낀 '지옥'인데,
그 반응이 이토록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베스트 리뷰처럼 '최고급 재료로 만든 비빔밥'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느 기자의 평처럼 '진귀하고 피곤한 구경거리'일뿐인 걸까? 아니다. 그냥 허접스러운 영화로 치부하기에는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은 너무나도 뚜렷하다. 눈치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이 모인 극장 안에서 피비린내가 풍기는 가운데 "푸흡"하고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영화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웃겼'기 때문이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목소리를 낸 사람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서웠'기 때문에 적막을 깨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단순히 어둠이라는 얇은 익명에 숨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이 영화에는 '정말 웃기는 이야기'와 '정말 무서운 이야기'가 함께 녹아있다. 그런데 지옥은 정말 무서울 순 있어도 정말 웃길 수는 없다. 단 한 명의 관객(사이코패스가 아닌 정상적인 관객이라는 가정 하에)이라도 웃음을 뿜었다면, 이 영화가 그린 것은 수라도(지옥도)가 될 수 없다. 물론, 수라도가 없으니 한도경(정우성), 박성배(황정민), 문선모(주지훈), 곽병규(곽도원), 도창학(정만식)으로 대표되는 이 세계의 악인 중 그 누구도 '아수라'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아수라'나 '수라도(지옥도)'는 없다. 그저 평범한 정도의 다섯 악인과 그들이 뿜는 어설픈 피비린내가 있을 뿐이다.




아수라의 탈을 쓴 '본성'과 살길을 찾는 '자아'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왜 감독은 이렇게 애매한 수라도를 재현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들은 아수라를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일까? 이 영화의 스토리에 등장하는 악인은 왜 하나같이 모자란 부분을 가진 것일까? 왜 거대한 사건도 조용히 처리하는 박성배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나쁜남자인 한도경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그런 한도경을 혐오하는 문선모와 도계장은 왜 항상 한도경의 목을 조르다 마는 것일까?


출처 : 다음 영화(movie.daum.net)


  나는 이들 다섯의 인격이 결국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인 악한 마음은 순수악과 위선악으로 나뉘어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의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 박성배로 표현되는 순수악과 김차인으로 표현되는 위선악은 각각 무형의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 말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강한 권력으로 사실과 진실을 가리고 뒤집는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갖고 있는 무형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육체적 힘을 얻어야 한다. 순수악의 육체는 문선모이고, 위선악의 육체는 도창학(도계장)이다. 이들은 순수악과 위선악이 내린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그들을 위해 행동한다.

  그렇다면 한도경은 무엇인가? 한도경은 악함과 선함을 동시에 갖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아내를 위해 피범벅이 된 몸으로 아내를 찾아가고, 아내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섬세함과 아내의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손수 닦는 자상함을 보여준다. 그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악함을 통제하는 인물로 '자아'에 가깝다. 그의 아내는 병상에 누워 죽어가지만 "절대 나쁜 짓 하면 안 돼"라는 말로 한도경의 마지막 남은 '도덕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두 악의 중심에서 '살 길'을 찾는 자아 / 출처 : 다음 영화(movie.daum.net)


  결국 영화가 그리는 세상은 한 사람의 내면이며, 그 사람은 '선과 악'의 사이에서 '선'을 찾는 '자아'가'가 아니라 '순수악과 위선악'의 사이에서 '살 길'을 찾는 '자아'를 갖고 있다.




사실, 선(善)은 죽지 않았다

  영화 아수라(Asura : The City of Madness, 2016)를 보고 불쾌함을 느낀 이들은 '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일 것이다. 그래서 세상엔 선과 악이 존재하고 이들이 조화를 이뤄 행복한 이야기를 써 가는 것이 세상이라고 믿는 이들일 것이다. 그런 자신의 기대와 달리 영화 속에는 선다운 선은 등장하지 않고 끝끝내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악이 다 함께 침몰하는 '종말'을 봤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유로 기분이 나쁘다는 관객이 있다면 나는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오시면 기분이 나쁘지 않으실 거예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엔딩은 악인에게 '조지나 뱅뱅'을 먹인 자아가 선(善)의 길을 택하고, 결국 선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모두 제거한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조지나 뱅뱅이다 이새끼야
- 내가 뽑은 <아수라>의 명대사 -

   그 증거로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직전 박성배는 한도경에게 "서울대 출신"의 최고의 의료진을 준비시켰다고 말하고, 한도경은 의료진의 멱살을 잡고 "인턴도 들여보내지 말아야 한다"면서 "반드시 살려내"라고 압박한다. 결전을 앞둔 순수악과 자아가 마지막으로 한마음이 되었던 일이 '선을 살려두는 것'이었다. 또한, 감독은 피를 흘리며 기어가는 '차승미'에게 두 발의 총알을 관통시키고, "엠뷸런스를 불러주세요"라고 헐떡이는 '김차인'의 심장에도 총알을 박아 넣는다. 뒤이어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박성배'는 깔끔하게 머리를 관통시키며 '확인사살'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 같았던 자아마저도 초점을 잃은 눈을 깜빡이지 않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렀음을 표현한다. 이처럼 수 분에 걸쳐서 인물 한 명, 한 명의 죽음을 한 발, 한 발 친절하게 그려준 감독은 오직 '선'의 죽음만은 프레임 뒤편의 모호한 경계로 남겨둔 것이다.


  선의 죽음을 끝내 확인시켜 주지 않은 감독 덕분에 우리는 "선은 죽지 않았다"라거나 "선 빼고 다 죽었다" 혹은 "악은 모두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가지 표현을 '해피엔딩'이라 말할 수 없다면 과연 어떤 결말이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선'은 죽지 않았다. / 출처 : 다음 영화(movi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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