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사과 Oct 18. 2022

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살고 있다


카펠라고든이 위치한 욀란드 섬은 2000년부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적지다. 석기시대부터 내려온 북유럽 특유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대지가 만연하다. 대지에서 비롯된 특색 있는 자연경관 덕분에 욀란드 섬의 중간부터 남쪽 전체가 모두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Stora alvaret 스토라 알바렛인데, 여기서는 보통 줄여서 Alvaret으로 부른다.


학교 정문을 나와 길을 건너고 집들을 몇 채 지나치면 알바렛이 나온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마침 순수 미술을 배우는 주간이었다. 이번엔 알바렛을 주제로 뭔가 만들어볼까 해서 사진을 찍으러 다녀왔다. 화창한 햇살을 기대했지만 스웨덴의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겨울 회색빛 하늘이 되었다.


알바렛에 들어서면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활한 벌판이 눈에 들어온다. 일 년 내내 메마른 듯한, 그래서 약간은 쓸쓸한 느낌이 드는 이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지나쳐온 집들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알바렛 안으로 걸어간다. 정신을 차렸을 땐 주위에 정말 자연만 있어서, 인간은 참 작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눈이 녹기 시작해 물웅덩이가 많이 생겼다. 한 켤레뿐인 내 장화가 젖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욀란드 섬 중간부터 남쪽으로 쭉 이어진 스토라 알바렛
알바렛으로 가는 입구
이런 초원이 끝없이 이어진다




오늘은 입구에서만 사진을 얼른 찍고 돌아갔지만, 약 20분쯤 걸어가면 우리가 The Rock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이름이 말해주듯 2미터는 족히 될 커다란 바위가 하나 덩그러니 있는 곳이다. 슈퍼문이 소식이 들린 날 친구들과 해가 질 때쯤 The Rock에 갔다. 


어떻게 길을 찾았냐고?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알바렛도 여러 번 가다 보면 눈에 익는 스폿이 있다. 그것들을 이정표 삼아 찾아간다. 이 즈음에 이 덤불이 있고, 저 즈음에 이런 바위가 있고, 그다음에 약간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등등. 매우 아날로그적이다. 물론 구글맵도 있지만 우리들은 굳이 그걸 써서 찾아가기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길을 찾아서 가고 있었다. 


2미터는 족히 넘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가 누워서 하늘을 보며 달을 기다렸다. 다 같이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자니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에서 캠핑했던 기억이 났다. 대학생 때도, 사회인일 때도 밤에 바깥에 누워서 별을 바라본 적은 있었다. 그것보다 더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다니 신기한 일이다. 아마 그 이유는 여기가 카펠라고든이어서일 것이다. 모두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곳이니까!


슈퍼문을 보러 the rock으로 가는 길




자세히 보면 귀여운 이끼도 많고, 이끼 사이에 새 깃털이 떨어져 있기도 하다. 봄이 되면 알바렛에서만 볼 수 있는 꽃들이 하나씩 피기 시작한다.


또 유네스코 문화유산 가까이에 살아볼 기회가 있을까 싶어 매일 가야지 생각하는데 의외로 쉽지 않다. 그러나 알바렛은 언제 가도 새로운 생각과 영감을 잔뜩 받고 돌아올 수 있는 곳이다.




이전 17화 털 깎는 게 무서워 울타리를 넘어 도망친 새끼 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