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40대 후반에 자아 찾기

늦었지만 나를 위한 시간을 구상해 본다

늘 시곗바늘은 여전히 쉬지 않고 다그친다.

아이의 등교를 위해 밥을 차려주고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에도 내 눈은 휴대폰 시간을 보고 있다.

첫 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15년 넘게 반복되는 일상이 분명히 익숙할 때도 되었는데, 아침은 여전히 숨 가쁘고,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여유를 부리 지를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나를 심각하게 바라본다.


회사에서 직원복지 개념으로 심리검사와 상담서비스를 제공한 그날, 상담시간도 회의와 업무 협의로 20분 늦게 도착한 나는 미안함과 어색함을 몸에 반반씩 담아 상담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상담원은 나를 반갑게 맞으며 자리에 오라고 손짓한다. 상담사는 요즘 근황을 묻고 바쁜데도 시간 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림을 그릴 것을 요청했다. 요청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있는 모습을 그리라는 것.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8월 장맛비로 우산이 넘어가는 사람이 생각이 나기도 하고, 노란 우비와 장화를 입은 아이기 생각나기도 했다. 이내 연필을 잡고 있는 손은 장대비에 노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다 그리셨나요?"

대충 그린 듯 하지만 잠깐이라도 고심한 그림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으신가 보네요"

"네?"


상담원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그림에서 비는 스트레스를 의미한다고 했다. 나는 흰 종이에 비를 굵게 사선으로 내리쳐 꽂았으며 몇 줄기도 아닌 세찬 비를 그려내고 있었다. 물론 당황했지만 상담원에게 더 이야기하라는 눈빛을 나도 모르게 보냈다.


"보통 사람들은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있는 모습을 그리라고 하면, 자기 자신을 그리는데, 선생님은 아이를 그리셨네요. 이 아이가 누구일까요?

"아 우리 아이들이죠. 비 오는 날 우산 쓰고 학교 가는 아이가 생각나 그렸어요"


상담원은 나의 눈을 한참 바라보며  삶 속에 아이들을 위한 시간과 나를 위한 시간을 비율로 이야기하라고 한다. 그렇다. 난 하루에도 가정과 일로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은 출퇴근 시간 중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보는 것이 다였다. 사실 이것도 나를 위한 시간이기보다는 가정과 일터로 가기 위한 과정일 뿐,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요즘 들어 회사가 시끄럽고,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미치지 못할 때 오는 텅 빈 감정, 내적 공허감이 유난히 내 몸을 감싸고 었는데, 이미 뇌 머릿속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반영하고 있었나 보다.


매사에 긍정적인 게 나의 장점이었는데, 이제는 어떤 일을 시도할 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위기를 모면하는데 급급해지고 있다.


좋아하는 시나 글을 보며 행복했던 나는 이제는 책을 목차만 보고 내용을 꿰뚫고 있다는 착각 속에 세밀히 보는 눈과 시간은 날아가 버렸다.


어렸을 적 꿈꿨던 삶 중 반이상은 이뤘는데 못 이룬 반을 바라보며 비교하고 좌절하며 아등바등 살고 있다.


이제 육아로 직장 때문에 나 자신을 소홀히 한다는 핑계는 버려야 되겠다.  나를 위한 시간을 잃음으로 내가 행할 수 있는 힘을 잃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가치를 아는 것일 텐데, 정작 나는 나를 포기하고 주변에 가치를 심어주려 애썼다. 40대 후반이 돼서야 내적 공허함의 원인을 절실히 깨닫는다.

모두가 늦었다고 하겠지만 지금이라도 도전하련다.    


지금 당장 집 어느 곳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 책상부터 만들어야 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7살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