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존재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자

by 선향

출근할 때 마다 일부러 빙돌아 지나가는 제법 넓은 밭이 있다. 구획을 나누어 온갖 농작물과 꽃을 재배하는 텃밭이다. 겨울에는 그 땅이 텅 비어 바짝 얼은 황토색 흙 위에 하얀 눈이 쌓인다. 봄이 되면 사람들이 옮겨 심은 상추와 온갖 쌈 야채들이 자란다. 여름에는 씨를 뿌려 놓은 고추나 토마토, 가지 같은 작물의 꽃과 잎이 가득 하고, 가을이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다가, 겨울이 다가오면 어느덧 누렇게 마른 잎들이 싹 뽑히고 정리된다.


그 밭의 사계를 몇 번 지켜보니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이 저절로 와 닿는다. 그리고 씨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와 닿는다. 텅 빈 땅 위에서 벌어지던 그 수많은 생명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돌이켜보니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물질이 된다는 말도 와 닿는다. 그 땅에 농작물이 자라는 것은 씨를 뿌리는 사람의 의도와 행위 때문이다. 생각의 에너지는 행위라는 과정을 거쳐 시간과 공간 안에서 물질이 되고야 만다.


십여층 높이의 단단한 건물이 자라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큰 자본을 가진 누군가의 더 큰 자본을 향한 의지가 작은 자본을 가진 누군가의 수요와 만나, 그 자본을 나눠가지는 사람의 노동을 거쳐 단단한 건물이 된다. 수십 년이 흐른 어느 날 누렇게 마른 농작물의 줄기를 뽑아내듯 그 건물도 허물어져 사라질 것이다.


의자, 책상, 컴퓨터, 스탠드 등등, 내 주위에 가득한 온갖 단단한 물질들이 한때 누군가의 생각이었고 의도였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니 내 생각이, 내 의도가 어떤 식으로든 내 말과 행위로 드러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가 인지하는 내 현실을 이룬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의 내 생각과 의도가 다음 순간의 내 현실을 만드는 씨앗이 된다. 나는 매 순간 내 세상 속으로 씨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자라날까? 내가 뿌린 씨들이 그대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해바라기 씨를 뿌리면 해바라기가 자라고 상추씨를 뿌리면 상추씨가 자란다. 그러니, 내 생각이, 내 의도가 해바라기 씨인지 상추씨인지 가려내어 해바라기 씨를 뿌리고 나서 상추쌈을 먹을 헛된 기대를 버리자.


더 많이 존재하고 더 적게 행위하라 (Be more, do less)는 말은 씨 뿌리기 전에 먼저, 내 상태와 의도를 잘 알아차려 상추를 먹고 싶으면 먼저 상추씨가 되고 해바라기 꽃을 보고 싶으면 먼저 해바라기 씨가 되라는 말로 이해한다.


여러 사람들 속에서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가 끌리고 좋아하는 무언가도 처음부터 품고 태어난 내 본래의 씨앗일 수 있다. 혼자 있는 조용함과 글쓰기가 좋은 나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들꽃의 씨앗을 품은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30년 사회생활을 하며 대외업무를 했으니 속으로 얼마나 부대끼며 살아왔겠나? 참 수고가 많았구나 하고 내 머리를 쓰담쓰담 해준다.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이 원래 어떤 씨앗으로 태어난 존재인지 얼추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감이 안 잡혀도 자꾸 자신을 들여다보면 뭔가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감이 잡히면 지금 현재로 돌아와 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생각과 의도의 씨앗을 뿌리자.


씨앗은 씨앗일 뿐, 씨 뿌려지고 자라나야 꽃이 되고 열매가 된다. 그 존재로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생각과 의도의 씨앗을 팍팍 뿌리자. 그리고 자신 앞에 펼쳐진 시공간에 나라는 존재가 타고난 원래 모습대로 싹 트고, 자라나고, 꽃 피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말하고, 글 쓰고, 행위하자. 그렇게 먼저 충분히 존재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자.


서너 개


일생의 시는 서너 개

일생의 꽃도 서너 개

순간의 꽃을 그려낸 시

서너 개만 되어도 좋지

남는 건 백골 같은

서너 개의 순간들

허연 인이 바람에 다

바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