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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원짜리 구두 신은 마음

왜 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가

by 선향

점심시간 무렵, 조계사 앞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마음은 한 없이 초라하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내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내 자신을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내 자신을 드러내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오후 근무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사무실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해야 했다. 그때 나는 전날 시장에서 산 '오천 원짜리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날 하루 만이 아니었다. 돌아보면 직장 생활을 하며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너무도 많았다.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안 된 느낌, 초라한 나 자신을 어디에도 내놓고 싶지 않은 기분, 내가 부족한 느낌, 수치스러운 나 자신의 일부를 숨기고 싶은 기분. 오천 원짜리 구두를 신은 나는 이렇게 내 존재를 오천 원짜리 싸구려 물건으로 여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기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저울이 하나 있다고 하자. 정직하게 평가하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는 얼마인가? 귀하게 여김을 받아본 사람은 자신 있게 자신의 존재 가치는 '천금'이요, '만금'이요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 없이 가볍게 여겨져 자꾸만 풍선처럼 떠오르려 하는 내 존재가 간절히 매달려 버틴 바위처럼 무거운 한 마디가 있었다.


"네가 알고 있는 너는 실제의 네가 아니고 너의 본래 모습은 한없이 크고 밝다."

부처님이 얘기하신 참 자아, 본래 면목에 대한 말씀이셨다. 진아 (眞我)의 가르침은 내게 있어서 '크고 밝지'만 세상에서 무게를 잡기엔 충분히 '무겁지 않았나' 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도금처럼 입힌 부처님의 말씀이 위안이 되어주긴 했으나, 나는 여전히 마음 속 깊이 깔린 '내가 너무도 가볍고 값싸고, 그리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증상에 시달리곤 했다.


30년 직장 생활에서 자신이 자랑스럽고, 가치 있고, 안정되고, 든든하고, 멋지고, 깊이 뿌리 내린 존재라고 느껴진 날이 얼마나 되었던가? 이유 없는 불안감과 초조함, 막연한 수치심과 미열처럼 깔린 두려움으로 가슴을 콩닥거리며 보낸 주말은 또 얼마나 많았었나?


이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불안감에 떨던 날들 속, 나는 '오천 원짜리 구두'를 신고 있었다. '돈'의 가치로 나를 판단하는 세상의 기준이 내 눈 안에 초기 설정 값으로 장착되어 있었나 보다. 내 눈에 장착된 그 초기 설정 값으로 내 가치를 볼 때, 나는 오천 원짜리 구두를 신고 다니고 직장에서도 뛰어난 능력이나 자질이 없이 언제나 대체가능한 기계의 부속품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를 수제 명품 구두처럼 버릴 수 없는 찬란하고 값진 존재로 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첫 날, 아니 태어난 순간부터 이 문제는 나를 평생 따라 다녔다. 나는 1월 중순 한겨울에 농사꾼 집안에서 다섯 남매 중 넷째 이자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 딸 둘,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을 기대하고 있었던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후 실망하여 갓난아기를 윗목으로 밀쳐놓았다고 한다. 군불을 떼는 온돌방이라 아랫목만 따스하고 윗목은 싸늘했다. 애기가 추위에 떨며 오옹, 오옹 애기고양이처럼 앓는 소리를 내자 엄마가 아랫목으로 데려와 이불을 감싸주었고 그제야 잠들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선생님께서 이름을 부르면 아이들이 줄을 섰다. 내 이름이 불렸는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다음 아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결국 나는 그 줄에 끼어들지 못했고, 뒤쳐져서 아이들이 줄지어 어딘가로 가는 것을 멀뚱히 지켜보아야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는지 그 이후 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겨울 내도록 앓았고 안방에 누워 있었다. 고모부께서 오셨는데 내 이름을 부르며 빨리 나으라고 말을 걸어주었다. 그때 깜짝 놀랐다. 어, 이분이 내 존재를 알아보네, 내가 있는걸 알아주네 하는 생경한 놀라움 이었다. 5남매가 우르르 몰려가 인사하면 그 속에 존재가 묻혀서 한 번도 제대로 인지 받지를 못했었기에.


'내 역할을 인정받는 내 존재의 자리'에 대한 결핍이 인생의 초기 값으로 깔리면서 타인의 인정을 구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합하게 나를 맞춰가는 것이 셋째 딸로서 내 인생 생존 전략이 된 것 같다. 다행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날 많이 예뻐해 주셨고, 말 잘 듣는 조용한 아이로서 내 학교생활은 내내 순조로웠다. 온순한 셋째 딸과 말 잘 듣는 우등생의 장점을 잘 살려 운이 좋은 사회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실적 경쟁과 성과창출' 이 기본인 사회생활에서 삼십 년 가까이 줄곧 가슴 콩닥거리는 불안감과 자기 인정 결핍에 시달려왔다.


과연 내 문제가 '자기 인정 결핍' 이라면 '자기 인정, 자기 신뢰를 쌓아가는 방법'에 대한 지구별 인생 보고서를 한번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상사를 맞아 적응기를 거치면서 도전적인 일의 격류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것도 당장의 인생 도전 과제이다. 이 글이 나와 같은 인생 주제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작게나마 도움과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미줄


문득 고개 돌려

지친 얼굴로 앉아 있는

옆자리의 그 사람을 위로해주자.

이 아침,

그 사람이 그 어떤 끈적끈적한

삶의 거미줄을

헤치고 나왔는지

알 수 없잖은가?


깨어나지지 않는 꿈속으로

한없이 터벅터벅 걸어 나온

아침,

아침.


저마다 혼몽의 거미줄을 헤치고 나온

그 사람을 위로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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