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울의 아들>을 보고서
이레이셔널 맨, 남과 여, 나를 책임져 알피, 클로저.... 주구장창 멜로 영화만 보다가 (클로저 보기 바로 직전엔 고스트 스토리를 봤긴 한데, 이걸 멜로 영화라 하긴 좀 그래서... 이것도 드라마에 가깝지 않을까) 사울의 아들이라는 영화를 봤다. 개인적으로 전쟁 영화를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팔 다리가 잘리는 장면은 볼 때마다 힘들걸 어떡해….) 잘 안 보는 편인데 어째 세계 2차 대전 배경의 영화는 몇 편 봤다.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 피아니스트, 덩케르크, 웨이 백 그리고 오늘 본 영화 사울의 아들까지. 적어 놓고 보니 다들 명작이긴 하네.
주인공은 헝가리 출신 포로로 아우슈비츠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각지에서 온 포로를 가스실에 넣고 그들의 시체는 태우고 그리고 재를 강에 묻는 그런 일, 그들을 '존더코만도'라 부른다. 주인공 사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스실에 들어갔던 포로들의 시체를 옮기려는데 어떤 남자아이가 살아남는다. 끝내는 나치 군의관에 의해 질식사하지만. 군의관은 아이의 부검을 명령하지만, 사울은 이 아이를 유태교 방식으로 장례를 치러주길 결심한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에서 개인은 얼마나 그 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폭력적인 체제는 전쟁과 함께 태어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가담하는 사람들도. 마치 아이히만처럼 말이다. 우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에 애써서 따르는 자와 어쩔 수 없이 따른 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걸 구분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린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럼 과정조차 같은 결말이라면 동일하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나. 심적 동요를 느끼며 민간인을 가스실에 밀어 넣던, 아무런 가책을 못 느끼며 밀어 넣던 차이가 없다는 걸까? 허나 하나 확실한 건 영화 사울의 아들에서 사울은 인간으로 죽었지만, 영화 박하사탕에서 김영호는 괴물로 죽는다.
누군가 그랬다. 삶은 의미가 아닌 욕망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삶의 어떤 순간에는 우린 그 무엇도 욕망할 수 없다. 그런 순간 우리를 지탱시키는 건 욕망이 아닌 의미가 아닐까. 독립과 민주화를 바라는 그러한 극적인 순간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순간은 욕망이 의미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다. 미얀마에서는 군부 쿠데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계속되고있다. 아프간과 미얀마에 있는 내 또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거나, 이미 죽었거나 그리고 죽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항하고 있다. 나는 그 가엾고 멋진 친구들이 마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