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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도니 Sep 23. 2023

하루키 신작과 불확실한 나

독서감상문과 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2023)>, 오랜만에 하루키다. 가장 최근에 읽은 하루키 작품은 작년에 읽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저기서 에세이집 빼고는 거의 다 읽었다.

얼마 전 하루키 신작을 들고 다니니까 (책이 커서 가방이 비좁아질 때가 더러 있다. 이 책은 768쪽)같이 일하는 약사님이 “약사님은 어려운 책을 좋아하시네요.”라 하셨다. (실은 바로 전에 들고 다니던 책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23, 특별판)>로 1056페이지였으니 아무래도 1kg가까이 되는 책을 연달아 들고 다니다 보니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 그때 나는 아마 ”아 저 하루키 팬이에요. “라 말했던 거 같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내가 하루키의 팬이라고? 싶어 오늘 서점에서 간 김에 매대에 있는 하루키 코너에서 몇 작품이나 읽어봤나 세어봤다. 매대에 비치된 것만 해도 소설, 에세이 포함해 8개였다. 이 쯤되면 팬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대부분의 책은 사서 읽었다.

꽤 무거운 책을 읽었다. 제일 윗 책은 오늘 산 책, 얇은책

소설은 꽤 심플하다. 사실 줄거리를 보고 싶으면 인터넷상의 책의 소개 부분이 이 소설의 골자라 봐도 무방하다. 이야기는 40대 중년의 내가 17살 때 만났던 16살 소녀와 필담과 이야기로 주고받으며 만든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오간다. 그 도시의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고 도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 도시에는 단각수가 살며 주인공은 그 도시의 도서관에서 소녀가 만든 차를 마시며 ‘오래된 꿈’을 읽는다. 주인공은 이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 그림자를 떼어내고, ‘오래된 꿈’을 읽기 위해 눈에 상처를 냈다.


이 ’ 벽으로 둘러 싸인 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은 후반부에서 명확해진다. 소설 속 ‘옐로우 서브마린 소년’의 두 형 중 의과대학을 다니는 형은 주인공이 말하는 ‘벽으로 둘러 싸인 도시’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게 주인공의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즉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주인공의 무의식의 세계이고, 그 그림자는 자신의 무의식이다. 주인공은 그 도시 즉, 십 대 시절 만든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생각이 실존하는 현실의 삶을 겉돌게 했다. 무려 30년 가까이. 이런 무의식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 건 비단 주인공뿐만 아니라 연인으로 등장하는 커피집주인도 그렇다. 그녀는 철갑옷 같은 속옷을 입는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느끼는 성관계의 어려움과도 연관된 부분일 것이다.


왜 소설 속 인물들은 아니 우리의 실체의 삶이 이다지도 어려울까. 이건 그 도시에서 꾼 주인공의 꿈을 보면 납득된다. 전쟁 중 나는 하사관과 함께 숲에 숨어 흰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절벽에서 투신하는 걸 목격한다. 내가 의아해하자 하사관은 말한다. 의식을 죽이기 위해서라고, 그게 때로는 가장 편한 길이니까. 그렇다. 현실의 우리는 내 의식을 죽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림자 (무의식)은 나의 헤리티지이자 나의 ‘오래된 꿈’이고 내가 충분히 소화하고 나면 떠나야 할 것들인 것이다. 유년의 무의식은 우리의 삶에 얼마나 발목을 잡던가. 아니지 이건 발목을 잡는 수준이 아니라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마냥 우리의 수많은 의사결정과 감정선 기분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까지 말하니 마치 우리가 유년의 마리오네트 같다고 느껴지는데 그래서 주인공은 엘로우서브마린 소년이 꿈에 나왔을 때 그의 마리오네트에 귀가 물렸을지도 모르겠다. ) 오버하냐 싶지만 텔레비전 프로그램 <금쪽상담소>만 봐도 그렇지 않던가. 오은영 박사님과 게스트의 상담을 보면 게스트가 겪는 문제는 대부분 유년시절의 상처나 경험들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 한 채 성인이 돼버린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일전에 심리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상담 선생님은 성장 배경을 들으며 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내가 왜 그렇게 느끼고 스트레스받는지 그렇게 반응하는지 이젠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불안감은 내 안의 7살 먹은 꼬맹이가 느끼는 감정이다. 나는 서른이 넘었는데, 내 의사결정 과정과 감정은 걔한테 휘둘리고 있다. 나는 ‘벽으로 둘러 싸인 도시’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여기에 내가 그 도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비법을 공개한다.

1. 부정적인 상황 발생
2. 해당 상황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의 적절성 및 실효성 판단. 그 부정적인 생각의 실리적인 면은 취한다. (걔 중엔 고려해 봄직한 것도 있다.) 그리고 비합리적인 건 생각은 폐기.
3. 부정적인 감정을 언어화해서 각기 이름을 붙여준다. (스트레스받는 다라 표현하지 않고 슬프다 혹은 무기력함을 느낀다.)
4. 맛있는 걸 먹고
5. 일기를 쓴다.


서른이 넘어야 내가 나로서 사는 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려 한다. 물론 아직도 혼란스럽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왜 나는 나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냥 이젠 포기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에. 마치 지구가 도는 걸 받아들이듯이. 아 하루키가 내 감상문을 보면 뭐라 생각하려나. 뭐 볼 일도 없을 거 같으니까 시원하게 여기서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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