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생(生)과 사(死), 그 한 끝 차이
'죽어가는 과정이 삶'이라는 묘한 문장은 허무함을 표방하는 것일 수도, 희망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존재론적 인식을 포괄하는 이 문장을 두고 한참을 고민해본다.
'죽음'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부터 따져 볼 필요가 있겠다. 죽음이 허망함, 두려움을 지닌 존재라면 '죽어가는 과정'은 어차피 맞닥뜨려야만 하는 불운한 숙명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반대로 '죽음'이 분명한 종착지임에 안도하고 받아들인다면, 주어진 삶을 더욱 가치 있게 살아갈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죽음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인류와 생명체에게 주어진 평등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 이는 끝없는 비교와 박탈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곤 한다. 사실상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찰 끝에 후자와 같이 결론 내리긴 쉽지 않다. 척박한 세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영혼 없는 위로나 정신 승리로 생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안다.
각자의 판단에 내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삶은 내가 뛰어들어 구원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이 나를 극한까지 몰고 있다고 느껴질 때면 문득 "어차피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이어 "어차피 끝에는 죽음뿐인데"라는 마음이 피어오를 때면 이리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강력한 회의감이 든다. 나는 죽음과 생을 완벽히 분리해서 보고 있었다. 죽음이 감사한 종착지가 아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허망하게 만드는 절벽같이 여겼었다.
하지만, 내 삶의 끝에 절벽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죽음은 생을 더욱 생(生) 답게 해주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라는 건 그저 단편적이고 생물학적인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하나의 개체로서 호흡하고 움직이며 그저 연명하는 것, 죽지 못해 사는 존재가 된다.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에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게 된다. 주저앉아서 한참을 또는 평생을 쉬려 할지 모른다. 여정에는 종착지가 있어야 한다.
낭만에 가까운 낙관 같기도 하지만 사실 굉장히 과학적인 고찰이다. 우주를 포괄하는 거시적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본다면, 생(生)에서 사(死)로의 생애의 이동은 훨씬 보편적이고 자연스럽다. 이미 우주에는 많은 것들이 죽어있다는 것이 신기하게도 위안이 된다. 우리는 이미 죽은 별에서 쏟아져 나온 빛들을 보며 감탄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 별은 결국 죽지 않은 것이다. 생생한 별빛이 내게 닿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저 별빛이 되는 것이다. 지금 주어진 생에 최선을 다해 온몸으로 찬란한 빛을 쏟아내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빛이 또 우주의 어딘가에 닿을 것이라 믿는다.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에서 불멸할 테지.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빛'들을 보며 나의 생 또한 그렇게 못 박히길, 죽어서 더욱더 찬란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