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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젠틀리 Sep 12. 2024

뉴욕에서 빚쟁이가 되다

I ask in all honesty
What would life be?
Without a song or a dance,
what are we?
So I say thank you for the music,
for giving it to me

솔직히 말해요,
어떻게 살 수 있죠?
노래와 춤 없으면 어쩌죠?
그래요,
음악이 있음에 난 정말 감사해


뮤지컬 맘마미아
"Thank you for the music" 중에서
 

사진: Unsplash의 Evgeniy Alyoshin


딸들과 둘러앉아 기타 치며 노래하길 좋아했던 엄마, 피아노를 전공한 언니, 배우지 않은 악기도 조금만 씨름하다 보면 금세 연주해 내던 동생. 미국에 갓 도착해 영어 한마디 못했던 어린이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취업해 왔을 때까지 어딜 가든 노래 동아리부터 찾던 나. 음악이 빠진 삶은 상상할 수 없었던 우리 가족.      


학교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공연을 준비하는 일상을 살다 보니 내 주변에는 음악과 춤 없이는 살 수 없을 친구들이 많았다. 아직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월요병에 흐물거리며 합창단의자에 눕다시피 앉아있는데 친구 한 명이 달려왔다. 주말 동안 뉴욕에 다녀온 메간은 말로만 듣던 브로드웨이 공연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생생한 후기를 들려주었다.


만족도 200%로 추정되는 메간의 내돈내산 홍보에 '뮤지컬이 저만큼이나 좋은 건가... 뭔가 연기도 과장된 거 같고 너무 비싸서 별로인 거 같은데.'라고 반사적으로 생각한 건 비밀. 난 뮤지컬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주변에서 들어 사람들의  의견으로 둔갑해 있었다.




한인 학생답게 나태지옥은 없는 근면성실의 DNA에 순응하며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진학한 나에게 내 돈 주고는 평생 도전하지 않았을지 모를 뮤지컬 무료관람의 기회가 왔다. 학교 장학프로그램의 수혜자로 받을 수 있는 혜택 중에 하나였다. 프로그램 창립자는 장학생들이 경제적 형편에 구애받지 않고 문화생활을 경험할 기회를 얻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다음세대에 이로운 리더가 되길 바랐다.


기대를 가득안고 뉴욕으로 떠나는 공연관람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현생을 살아내느라 가볼 엄두도 못 내었던 곳. 이번 당일치기는 내 생애 첫 번째 뉴욕여행이었다. 이날의 추억은 이후에도 어찌나 자주 꺼내보았는지 기억에서 흐릿해지질 않는다.  


뉴욕여행의 아침이 밝았고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도착한 학교 주차장. 뮤지컬에 별 관심 없다던 나는 곱게 접어 저 하늘 위로 날려버리고 설레는 나만 출석했다. 행여 지각할까 깊이 잠들지 못한 탓에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지만 상관없었다.


버스로 3시간 반을 달려 말로만 듣던 세계의 중심도시 뉴욕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나를 깨웠다. 미국에 온 이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건 처음이었다. 서로의 어깨를 피해 가며 바쁘게 걸어 다니는 광경이 낯설면서도 고향 서울처럼 정겨웠다.   


뉴욕에 왔으면 피자는 필수지.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온 세명의 여학생들은 조각피자를 손에 들고 두리번두리번 "우와~"를 연발하며 뉴욕을 만끽했다. 길을 잃고 또 찾으며 도시를 탐색하다 보니 벌써 공연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사진: Unsplash의 Daiga Ellaby


열심히 달렸지만 지각을 면치 못한 우리. 이제 막 시작한 공연의 첫 곡이 끝날 때까지 공연장 뒤쪽에 서서 대기했다. 목에서 쇠맛이 느껴지도록 전속력으로 달려와 아직 핵핵거리고 있었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 없던 세라는 급하게 숨을 고르며 우리에게 속삭였다. "이거 라이브야?" 당연히 라이브였다.


빠르게 전환되며 관중을 압도하는 화려한 군무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는 립싱크로 오해할 만했다. 노래 한곡에 자신이 가진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기로 작정한듯한 배우들의 결연함이 무대를 지나 공연장 제일 뒤편에 서있는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닭살이 돋았다.


막연히 비호감이던 뮤지컬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나 뮤지컬 좋아하네?'였다. 자신이 평생 열심히 모은 재산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기부해 준 누군가 덕분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무언가를 거저 얻었을 때 과연 그게 공짜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의 노력의 결실을 내가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진 것 하나 없는 대학생에게 주어졌던 당일치기 뉴욕여행 '큰 빚을 졌구나. 앞으로 나에게 남은 날들은 빚을 갚으며 살아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해 주었다. 기분 나쁜 부담스러운 빚이 아니었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여기까지가 빚을 진자의 마음으로 살게 된 사연이자 사랑하는 사람과 언젠가 뉴욕에 가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함께 보고 싶었던 이유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세상의 많은 새로움에 까르르 웃던 스무 살의 청량함은 지나갔지만 나는 또 다른 종류의 설렘을 가득 안고 사랑하는 남편과 뉴욕 타임스퀘어에 서있었다. 뮤지컬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익을 남긴, 부동의 인기를 자랑하는 라이온 킹 티켓을 손에 들고서.





Owe no one anything except to love one another
Romans 13:8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로마서 13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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